이곳 학교 역시 겨울 방학 중이어서 운동장 위에는 무릎까지 흰눈이 쌓여 있었고 교실은 텅 비어 이었다. 마침내 그 학교 기숙사를 찾았을 때 선배 두 분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두 분은 지금은 고인이 된 윤만덕 선배님과 침술의 대가이신 최봉학 선배님이었다. 그들은 나를 따뜻한 방으로 안내했다. 몸을 녹인 다음 뭇국과 밥 한 그릇을 얼음 섞인 김치와 함께 주어서 배불리 먹었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성찬이었다.
친구의 안내를 받아 기숙사 방으로 들어섰다. 그 당시 기숙사 형편은 매우 열악했다. 한 방에 다섯 명씩 공동으로 사용했다. 온돌방이라서 장작을 지펴 난방을 했다. 300여 미터나 떨어져 있는 교문 밖 우물에서 양철통으로 물을 길어다가 대야에 데워서 세숫물로 사용했다. 가끔 학생들이 물을 길어 양손에 들고 오다가 운동장 옆 도랑에 빠져 온몸에 물벼락을 맞을 때면 생쥐처럼 처량한 몰골로 강추위와 맞서야 했다.
나는 이곳 역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못된다고 생각했으나 친구들의 우정 어린 보살핌으로 며칠 간 공밥을 얻어먹고 편안히 쉴 수 있었다. 나는 이들 선배들과 친숙해지자 어떻게 하면 내가 진학해서 공부할 수 있겠느냐고 의논해 보았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 학교 시각장애인부 초임 교사인 최순화 선생님을 찾아 뵙고 통사정을 해보란다.
나는 용기를 얻어 결정권이 있다는 최 선생님을 찾아뵙기로 하고 선배들과 함께 안마해서 번 돈으로 곶감과 달걀 한 꾸러미를 선물로 들고 찾아갔다.
큰절을 한 뒤 나의 향학열에 관해 말씀드리자 최 선생님은 기특하다면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장학금이 없고 회비와 월사금을 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면서 “그 등록금을 준비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나는 부산 라이트 하우스 아동 복리회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등록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최 선생님은 일단 와서 시험을 치르라고 하셨다. 나는 신명이 나서 그 길로 곧장 부산으로 달려갔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박석권 형제에게 서울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자고 비밀리에 말했다. 드디어 2월 부산학교 제1회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나는 그 친구와 함께 그날 밤 부산 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나는 막상 기차에 오르긴 했지만 검표원을 따돌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때마침 상이 용사들은 자릿세를 받고 있어 상이 용사들이 잡아 놓은 두 자리에 자릿세를 내고 앉기는 했으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궁즉통이란 말이 있듯이 마침 옆자리에는 이동 경찰 부부가 앉아 있어 우리의 딱한 사정을 말하자 염려 말라면서 안심시켜 주어 우리들은 무사히 서울역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검표원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이동 경찰 부부는 우리를 역 건너편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기차를 공짜로 타고 온 대가를 지불하는 수고로 나는 경찰관을, 박 형제는 그 부인을 정성껏 안마해 주었다.
서울초등학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본 시험의 1, 2교시가 다 끝난 상황이었다. 아직 원서조차 제출하지 못한 우리는 교장실로 찾아가서 사정한 결과 그 다음 시간부터 시험을 치르도록 허락 받았고, 학교 측의 배려로 입학 시험까지 치를 수 있었다. 15명 정원에 35명이나 지원자가 있었으나 우리들은 당당하게 입학 허락을 받아 합격이란 기쁨을 얻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입학에 필요한 졸업증서와 입학금과 등록금을 준비하는 일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다. 부산에 내려가서 안영환 선생에게 말씀을 드렸으나, 우리들은 호되게 기합을 받고 야단을 맞았다. 허락 없이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석권 형제는 당당하게 우리들의 행동을 정당화해 달라며 따지고 들자 안 선생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졸업 취소의 위기를 넘기고 서울로 다시 상경해 서울초등학교 마룻바닥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마룻바닥을 책상 삼아
우리는 입학금을 내지 못해 책상조차 배당 받지 못한 채 한 달 동안이나 마룻바닥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어느 날 오후, 그 당시 국어담당 교사였던 우리 반 담임이 월사금 때문에 서무과의 독촉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돈 없는 죄로 담임에게서 엄청난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참으로 갈 길은 멀었다. 더 높은 세계 아니 정당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확실한 기회를 얻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하나님께 매일 밤 매달려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