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야기

Google+ LinkedIn Katalk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천주교를 믿은 죄로 1801년, 전남 강진으로 18년 간이나 귀양을 갔었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유배지 전라도 강진에서 홀로의 삶이었다. 아내 홍씨(洪氏)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현리(現 능내리)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귀양간지 10년째가 되던 해에 자신이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그리운 마음’을 담아 남편에게 보냈다. 

1810년 7월 다산(茶山)은 부인이 보내준 치맛자락을 잘라 붓으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 치마에는 다산이 ‘두 아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을 쓰고 이것을 책자로 만든 것이 바로 이 「하피첩(霞帔帖)」이다. 「하피첩」이란 ‘(붉은)노을 하(霞)/ 치마 피(帔)/ 문서 첩(帖)’으로 ‘노을 빛 치마로 만든 책’이라는 뜻이다. 

2005년에 수원의 어느 모텔 주인이 파지(破紙)를 마당에 내다놓았는데 폐품을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그 ‘파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모텔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얹혀 있던 이상한 책에 눈길이 갔고 그 책자에 호기심을 가진 그는 책과 파지를 맞바꿨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고 KBS TV ‘진품명품(眞品名品)’에 그 책을 감정 받고 싶어 내어놓았다. 당시 김영복 감정위원은 그 책을 보는 순간, “몸이 덜덜 떨렸다”고 했다. ‘진품명품’ 현장에서 감정가(鑑定價)로 ‘일억(一億) 원’을 매겼고 주인 없이 떠돌던 이 보물은 2015년 ‘서울옥션경매’에서 7억 5천만 원에 「국립 민속박물관」에 팔렸다. ‘하피(霞帔)’는 원래 옛날 우리 선조들이 입던 예복(禮服)의 하나이다. 글자가 뜻하는 바대로, ‘붉은 노을빛 치마’를 말한다. 

다산은 그 「하피첩」에서 그의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游, 1786∼1855)’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나는 벼슬이 없으니 너희에게 농장을 물려주지 못한다. ‘절대적 믿음’으로 너희에게 두 가지 글자를 남긴다. 한 글자는 ‘근(勤)’이니 ‘부지런함’이요, 다른 하나는 ‘검(儉)’이니 ‘검소함’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더 나은 것이어서 한평생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글자’를 두 아이의 어머니의 치마에 사랑을 담아 쓴 글씨이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값진 보물이 어디 있으랴! 

여기에서 다산은 치마의 한 조각을 남겨 ‘매화’와 ‘새’를 그려 족자를 만들어서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 이것이 『매조도(梅鳥圖)』이다. 다산 부부의 애절했던 사랑을 담은 이 「하피첩」은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천만다행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정약용의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치마폭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적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다.

‘다산학(茶山學)’의 산실(産室)이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의 위치가 강진의 백련사(白蓮寺)에서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이 두 곳은 약 800여 미터의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20~3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 근처에는 나무로 된 ‘차(茶)’가 많았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萬德山)에는 「다산」이라는 이름의 작은 봉우리가 있다. 그는 이 봉우리의 이름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다산(茶山)”이 그의 아호가 된 연유(緣由)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 18년의 대부분을 보내며 그의 저술 500여 권을 집대성(集大成) 하였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리는 고통”이었다고 표현하였다. 다산의 이 표현은 그의 초인적(超人的)인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려서부터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다산은 16세에 서학(西學: 천주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요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되는 아픔을 여러 번 겪었으나 역설적(逆說的)으로 다산의 긴 유배생활은 그의 방대한 저작이 탄생하게 된 중요한 바탕과 배경이 되었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근검(勤儉)”이라는 두 글자를 물려주면서 “절대적 믿음”으로 두 글자를 남긴다고 표현하였다. 이때 “절대적 믿음”이란 그의 “신앙적인 신념”의 표현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믿음’은 신앙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