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새로운 견해 :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 <1>
이렇게 성서는 종말과 부활을 부분적으로는 현재적 사건으로 이해하지만, 압도적으로는 미래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예수의 재림에 이어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최종적 심판을 위해 일어날 미래적,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해 왔고, 대다수 신학자들과 목사들도 그렇게 선포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 죽은 자의 부활이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죽음 속에서, 곧 죽음의 시간에’ 즉각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자주 등장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가톨릭 신학자들은 ‘죽음 속의 부활’이라는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영생의 근거가 인간의 자기 능력, 불멸의 영혼 또는 영적인 자아 의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구원자 하나님은 바로 창조자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 남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에게 의지하면서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인간의 자아는 죄나 죽음을 통해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긍정은 취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도 피조물은 멸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멸절은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폐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자들은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라너(K. Rahner)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 신학자 그레샤케와 로핑크의 기본적인 견해는 ‘죽음 속의 부활’이라는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로핑크(G. Lohfink)는 이를 다음과 같은 일곱 명제로 설명한다.
(1) 인간은 죽음 속에서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만나게 될 것이다.
(2) 이 만남은 심판이 될 것이다.
(3) 하지만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단지 심판자로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체험한다.
(4) 죽음 속에서 인간은 그의 육신과 영혼과 함께 그의 전체적인 삶과 그의 인격적 세계, 그리고 교환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전체 역사와 함께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5) 세계와 전체 역사는 우리 자신의 인격적 세계와 불가분리적인 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우리 자신과 함께 나머지 전체 역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6) 죽음 속에서 모든 시간은 침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죽음을 거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완성만이 아니라 이와 동시에 세계의 완성을 체험한다.
(7) 우리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그레샤케(G. Greshake)는 부패한 시체가 다시 살아나거나 변화되거나 다시 창조된다는 표상을 포기했다.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은 가시적인 육신이 변모한다는 의미에서 부활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육신은 시체로서 땅속에 매장된다. 몸의 부활이 신체의 부활이나 시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전인이 죽음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세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부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
몰트만(J. Moltmann)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죽음 속의 부활’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의 죽음 속에서 부활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이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며, 땅과 우리의 신체적 연대는 폐기될 것이다. 하지만 땅 위에 있는 모든 무덤은 인간과 이 땅이 결합되어 있으며 오직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닌가? 만약 새 땅이 없다면, 몸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새 땅은 인간의 새로운 신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고, 전적으로 부활한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이다. 물론 살리는 영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이미 이 삶 속에서 부활의 힘으로 경험된다. 생명의 영은 부활의 힘으로서 죽음보다 강하며,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멸할 삶의 전체는 이 영 안에서, 이미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이 삶을 여기서 죽는 것과 동시에 죽지 않는 것으로, 허무한 동시에 허무하지 않은 것으로, 시간적인 동시에 영원한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