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새로운 세계로 비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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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서도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주님, 나를 환경이 더 좋은 학교로 옮겨 주십시오. 상급 학생들의 부당한 대우도 견딜 수 없고 저들이 주는 모욕도 참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행패나 구타 혹은 린치를 당할 뻔한 일들은 정말 참아 넘기기가 힘이 드오니 나를 이곳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하고 큰 은행나무 밑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면서 간곡히 기도드렸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청량리 밖에 있는 임업 시험장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소풍 다녀온 다음날 전교생들이 장티푸스에 걸려 온통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학생들은 순화병원에 입원하고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훗날 장로님이 되셨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석안 전도사님을 찾아가 나의 딱한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기쁜 소식이 있다며 나를 곽안전(알렌 클라크) 선교사님께 추천해 주셨다. 나는 종로5가에 있는 선교부로 찾아갔다. 내가 만난 곽안전 선교사님은 평양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곽안련 선교사님의 아들로서 마침 젊은 시각장애인 학생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학비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학비를 도와줄 수 있는데 한 가지 조건으로 성경공부도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일반 고등학교에 들어가다

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알고 서울학교에 자퇴 원서를 냈다. 성적표를 받아 보니 다른 과목들은 우수한데 생리 해부 중에 있는 안마 과목만은 낙제 점수였다.

나는 몇 달 간 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는 한편 성경공부도 병행했다. 이른 봄날 김석안 장로님의 인도로 후암동에 있는 숭실중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청운의 꿈을 안고 달려갔다. 나를 반갑게 맞아 준 분들은 김취성 교장 선생님과 김구준 장로님과 이봉준 선생님이었다. 이미 두 선생님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얼마간 김취성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학생들은 정상인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자네가 어떻게 공부할 수 있겠는가. 일단 입학 시험이라도 쳐보는 것이 어떨까?” “좋을 대로 하십시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간간이 배운 공병우 타자기로 장시간 입학 시험을 치렀다. 학원에서 배운 문제들이 거의 출제되었기에 어렵잖게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숭실중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부모 형제는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나를 지켜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 나는 비록 시각장애인이었지만, 건강한 친구 삼천여 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에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나는 숭실중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처럼 최선을 다해 정규과목을 이수했을 뿐 아니라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낼 수 있었다. 점자 교과서도 없이 정상 학생과 똑같이 공부하려니까 어려운 학과 수업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무사히 학업을 마치기까지 친구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던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흑판에 쓰고 있는 글들을 친구들이 옆에서 일일이 불러 주어서 노트에 점자로 필기했고, 방과후에는 교과서를 일일이 점자로 찍어내기 위해 친구들이 읽어 주는 대로 받아 적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손가락에 피멍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친구와 함께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면서 밤 12시까지 공부했다. 5시가 되면 해방교회로 새벽 기도를 다녀와서 그 길로 학교로 갔고, 대용 빵 하나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성실하지 않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유일한 시각장애 학생으로서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적에 가까운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들의 따뜻한 가르침 속에 맺어진 스승과 제자 사이의 끈끈한 정을 잊을 수가 없다.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던 은사님은 수없이 많지만,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이정두 선생님과 미국에 계신 이성엽 선생님은 제자를 유난히 아껴 주셨다. 또한 김취성 교장 선생님과 독고영성 선생님, 김인성 선생님과 이봉준 선생님, 황진석 선생님의 격려는 두고두고 감사하다.

나는 숭실중고등학교 시절, 동정 점수를 받아 본 기억이 없다. 동료들과 함께 뛰면서 모든 일에 자신감을 지니고 참여했다. 비록 시각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었으나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주번도 섰고 하급생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이러한 나의 행동 철학으로 인해 내가 후암동 버스 종점에 내리면 학생들은 나를 위해 가방도 들어 주었다. 또 함께 팔짱까지 끼고 즐겁게 등교도 하고 하교 때도 불편 없이 다닐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누구든지 김선태 형을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 할 정도로 나는 후배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면서 학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부산역과 자갈치 시장에서 왕초거지로 존경을 받았던 것처럼 숭실중고등학교에서도 나는 학생 왕자처럼 꿈 많은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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