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이야기] 한국기독교 초기의 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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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는 초기부터 핍박이 심했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785년으로 서울 명동 김범우 집에서 이벽 씨가 예배를 인도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때 정부는 이벽, 이승훈, 정약전 등을 훈방했으며 김범우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아 밀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어 결국은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때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했으며, 서학서적 수입을 금했다. 이때 천주교에 대한 지식인들과 조상제사를 금하는 베이징 주교의 입장이 전달되어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유교적인 전통에서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신도들이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배교하거나 잠적했던 교인들이 다시 돌아와 1793년 베이징에 사제를 보내달라 요청했다. 그래서 1년 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그 후 사제가 생기면서 천주교를 떠나 잠적했던 신도들이 돌아왔으며, 특히 여성 신도들이 증가하는 등 점점 활기를 띠며 교회가 성장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이었던 신자가 얼마 후에 1만 명으로 증가되었으며 그 중에 여성신자가 반 이상이 되면서 여성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강완숙 씨는 용감하고 지성적인 지도자로 남자 신도들도 그를 존경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소식을 불란서 교회가 알고 주교와 신부를 우리나라에 파송했다. 그러나 정부는 1839년 불란서 신부 3명과 한국교회 신도 100여 명을 살해했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했으나 1884년 신도가 1만 7천577명으로 증가 되었다. 

김대건(金大建, 1822-1848) 신부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1848년 7월 28일 서울 마포 새남터에서 신도 11명과 함께 순교를 당했다. 새남터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목을 잘랐음으로 절두산(切頭山)이라고 했다. 핍박이 계속되어 수천 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그리고 주문모 신부와 이승훈, 정약용 등도 참수 되었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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