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 섭리’… 기독교인 된 것
평양신학교에서 민족과 신앙을 세우다
위대모 선교사는 평안북도 의주와 선천 두 곳을 염두에 두었는데 여러 가지를 고려하던 중 마펫과 위대모 두 선교사가 결단을 내려 경의선 철로에 위치하며 서북지방 교통의 중심지가 된 선천을 선교지부로 선정했다. 이로써 선천은 평북지방 기독교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나중에 이곳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부흥 발전했다.
선천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정한 4대 선교거점 중 한 곳이었다. 1896년 위대모 선교사를 선천에 파송했으며, 이미 예수교인이 되었던 소수의 사람과 함께 집회를 시작했다. 김석창은 초기에 전도를 받은 사람이었다. 위대모 선교사는 선천 선교의 시초였다. 그를 도와서 열심히 선교한 인물이 양전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김석창의 미래를 환하게 보여주는 출발이었다. 그리해서 한국교회에 큰 족적(足跡)을 남길 인물로 출발했다. 김석창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섭리였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로 김석창을 통해서 민족운동도 일어나게 되었다. 김석창은 그때부터 위대모 선교사를 열심히 돕는 전도자로, 민족을 깨우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이 무렵 선교부에서는 이곳 선천에도 미션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결과 1906년 드디어 남자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열렸다. 이미 이곳 선천읍에는 1900년에 여성 교육기관인 보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때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으나 남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왔다. 양전백, 소정관 등이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금도 후원했다. 이름하여 신성학교(新成學校)가 설립된 것이었다. 김석창은 이 학교에서 윤리와 한문을 가르쳤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목회에도 크게 유익했다.
김석창은 신성학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이 겨레를 사랑하는 민족 지도자를 기르는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자신도 학교를 위해 큰 몫을 감당했다. 특히 나라 잃은 백성 중에 젊은 학생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선교 사역이었다.
김석창은 신성학교에서 민족을 가르치고 신앙을 갖게 하는 성실한 교사로 크게 노력했다. 그럴 때 선천 선교부 위대모 선교사는 김석창에게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민족을 품은 교회 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했다. 이것은 위대모 선교사의 꿈이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김석창은 이에 주저하지 않고 얼른 응했다. 교육은 필요하나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자신이 과연 성직자로서 자질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뽑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되었다. 그리고 훌륭한 목회자가 되도록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를 기뻐하며 청년 조사 김석창은 곧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서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공부하듯이 학업에 열심히 임했다. 그는 사서삼경을 배우면서 이미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역자로서 필요한 신앙적인 인격도야(人格陶冶)에 최선을 다한 결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11년 3월 제4회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는데 동기생은 15명이었다.
선천군에 백현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 돌림교회 신자 김원부 부부가 이사 와서 복음을 전파한 결과 강득풍, 노상희가 믿고 읍내 교회에 다니며 예배드렸다. 신자가 점점 증가해서 60여 명이 됨으로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가 분립하니 김석창 조사가 인도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