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Google+ LinkedIn Katalk +

이 지구상에는 8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각 나라에서 제각기 자신의 문화와 전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무엇을 위한 삶인가? 우리가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고대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말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현대 실존철학자들은 이 땅에 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죽음’이란 문제 앞에 불안과 공포 속에 놓여 있는 존재라고 분석한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이 불안과 공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궁극적 문제인 한계상황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유신론적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 Jaspers)와 쇠렌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하나님과 연관해, 신 앞에 자신을 단독자로 세울 때 이성은 산산조각나게 되고 바로 이때 신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된다고 피력한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성경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예배하기 위함이고(출 5:1,3), 둘째는 선교하기 위함이다.(행 1:8)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예배와 선교를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으로 출애굽 해야 하는 이유는 ‘예배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이유는 ‘선교하기 위함’이었다. 예배와 선교가 우리의 삶 중심에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삶, 이것이 예배자의 삶이다.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시 50:5, 롬 12:1) 복음의 사람은 선교적 삶을 살아간다.

창세기 4장에서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이 일로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가인은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자’로 유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은 구속사적 측면에서 예배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의 자리에 셋을 뽑아 세우신다. 셋이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놋 땅에서 에녹을 낳고 그 아들 이름으로 도시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창4:17)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했다. 성경은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족보와 5장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 셋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은 자신이 스스로 힘 있는 자가 되어 ‘왕’으로 살아간다. 

이들의 삶에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왕의 행세를 한다. 그러나 셋의 후손인 예배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늘 살핀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자는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갈 2:20)을 살아간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사명이 나타난다. 여러분은 지금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황순환 목사

<서원경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