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양주동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5대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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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양주동 교수의 강의 중에 들은 한국의 5대 천재는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 유진오 양주동이라 말씀했다.

한국의 재주가 한섬이라면 춘원 이광수(1892-?)가 9말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는 일등 천재였다. 남은 한말에 최남선이 7되를 가져가고 홍명희 유진오 양주동이 각각 한되씩의 천재라 했다. 북한 정주 출생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도 썼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해 103번의 흥사단 단우가 되어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도 함께 했다. 현대인으로 안창호를 가장 존경하고 옛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존경인물이라 했다. 춘원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1917년 장편 계몽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고 이어 ‘흙’ ‘무정’ ‘이순신’ ‘단종애사’ 등 장·단편 소설을 많이 남겼다. 시, 소설, 평론, 수필 등 많은 문학작품으로 현대 신문화운동의 선구자로 이름이 높다. 일제의 흥사단 사건 이후 친일로 변절해 이광수는 천재의 빛이 크게 바래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3.1운동 때 읽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써서 애국심이 솟는 인물이다. 1908년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최초 신체시를 발표한 빛이 큰 시인이다. 그리고 1926년에 현대 최초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판했다. 안창호가 만든 청년학우회에 참여해 민족교육운동도 펼쳤다. 그러나 최남선도 사학자로서 친일의 흔적을 남겨 천재의 빛이 흐리다. 벽초 홍명희(1888-1965)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 일제시대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임꺽정전’을 연재해 천재소릴 들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연맹 위원장을 역임하고 1948년도에 월북해 김일성 밑에 부수상을 지냈다. 그 아들 홍기문은 한글학자로 한글전용에 이바지했다. 홍명희도 삶이 바람직한 천재가 아니었다. 현민 유진오(1906-1987)는 경성고보(현 경기고교) 재학중에 평균성적이 98점으로 어느 후배도 이 점수를 넘지 못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도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했다. 수재 천재라 할만하다. 한때 동반작가활동을 하며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 작품을 남겼고 동아일보에 ‘화상보’ 신문소설도 연재했다. 일제시대는 소설가, 광복 후에는 법학자 교육자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헌법기초자로 힘쓰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일제시대 26세로 보성전문 교수가 되고 광복후 고려대 총장을 역임했다. 정가로 나가 신민당 총재가 되어 정치 일선에 나섰다. 유진오도 내선일체 친일행위가 뚜렷해 천재 인격에 손상이 많은 인물이다. 한국천재 5인을 연세대학 국문과 강의실에서 밝힌 양주동(1903-1976) 교수는 1920년대 ‘조선의 맥박’ 시집을 발행하며 민족의식을 발휘하면서 ‘문예공론’ 잡지 주간으로 활동했다. 일본 조도전대학 재학시에 노산 이은상(1903-1982)과 우리말 영어로 말하기 시합을 이틀에 걸쳐 벌인 결과 2전 1승1무로 생존시까지 무승부라 했다. 

양주동 교수는 1935년 경까지 문필활동 하다가 향가연구로 역점을 바꾸어 그때까지 향가연구로 문학박사학위까지 받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일본인 소창진평 교수의 그릇된 향가연구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향가연구저서 ‘고가연구’를 출판해 일제시대 발행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 ‘한글갈’ 한결 김윤경의 ‘조선문자급 어학사’ 조윤제의 ‘조선시가 사강’과 함께 일제시대 5대 국어국문학저서가 되었다. 5대 천재중 큰 결점이 없는 인격적 천재는 스스로 천재로 말한 양주동 교수밖에 없다. 머리가 좋을수록 이기적인 인간이라 했다. 천재 소리 듣는 천재들의 친일, 공산사상 오점이 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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