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1840년)까지 미국과 서구에서는 무디((Dwight Lyman Moody)의 부흥 운동과 예수원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의 성령운동으로 선교의 열기와 사명이 고조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영국(1883년), 독일(1883년), 프랑스(1886년)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틈바구니를 이용해 신묘막측하게도 한국선교 기회의 문을 열고 계셨다.
중국 난징에 있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1884년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겸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다. 1884년 같은 해 7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헤론(John W. Heron)을 초대 한국 선교사로 임명한다. 마침내 1885년 4.5 부활절 오후 한국말로 된 마가복음 성경을 손에 들고 26세 총각의 몸으로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부부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고 한국선교의 문을 열게 된다.
같은 배를 타고 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내렸을까? 감리교에서는 한 살이라도 많은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먼저 내렸을 것이라고들 한다.
장로교에서는 위험한 땅이었으니 언더우드가 먼저 내렸을 것이라고들 한다. 내 생각엔 지난 140년 동안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틀림없이 두 사람이 손 잡고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렌, 아펜젤러, 언더우드 한국 초기 세 분 선교사는 공교롭게도 개혁교회 즉 장로교회 전통을 가진 분들이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님이지만 대학 시절까지 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더구나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어릴 때부터 개혁교회 신앙을 익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후에도 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개혁신학에 정통한 분이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 불타오르는 성령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뜨거운 성령의 사람이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 땅에서 유독 장로교회가 부흥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뉴저지주 애틀랜틱 저택에서 향년 57세로 별세할 때까지 31년간 한국 선교에 몸 바친 선교사였다.
(다음 편에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