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일흔 줄 인생은 백전노장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황혼을 맞았다. 깃발 펄럭이던 청춘은 추억일 뿐, 가슴에는 회한과 아픔만 남았다. 아무리 노년의 즐거움과 여유를 강조해도 우리들 가슴에는 낙조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다. 더구나 자연스런 노화 현상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 또는 모두가 옛날 같지가 않다.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화제는 자연히 건강 이야기다.
나의 청춘만은 영원하리라 믿었는데 어느새 고개 숙인 남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노년을 쾌락(탐욕)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덕의 근원인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로마의 대 철학자 키케로가 죽기 전 쓴 ‘노년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쾌락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된 것일까, 아니면 버림받은 것일까. 생로병사의 순리에 따라 우리가 좀 늙었을 뿐 사람마다 해답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버림받은 것이 아님은 확실하지 않는가.
무슨 짓을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나이, 남의 눈치보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원숙의 경지에서 더 이상 잘난 체, 아는 체, 가진 체할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 살면 되는 것을 어느 한 곳이 불능이라도 다른 곳 다 건강하니 축복이고 은혜라 여기며 살자.
스스로 절망과 무기력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어느 곳에 있을 자신의 용도와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인생은 70부터 고목에도 꽃이 핀다 했는데 지금부터라도 걷고, 뛰고, 산을 오르면서 젊게 산다면 인생 70~80에는 연장전 20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소년시절엔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너무 빨리 가서 멀미가 날 정도다. 말이 좋아 익어가는 것이지 날마다 늙어만 가는데 그 맑던 총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것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책장 앞, 냉장고 앞에서 “내가 왜 여길 왔지?”하고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약 봉지를 들고도 약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우두커니 서 있다. 이렇게 세월 따라 늙어가면서 나 자신이 많이 변해간다. 젊은 날에 받는 선물은 그냥 고맙게 받았지만 지금은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지고, 젊은 날의 친구의 푸념은 부담스럽게 느꼈지만 지금은 가슴이 절절함을 함께 한다. 젊은 날에는 친구가 잘 되는 것을 보면 부러웠지만 지금은 친구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고, 젊은 날의 친구의 아픔은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나의 아픔처럼 생각이 깊어진다.
젊은 날에 친구는 신앙적이고 지적(知的)인 친구를 좋아했지만, 지금의 친구는 내 마음을 읽어주는 편안한 친구가 더 좋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익어가는 나이가 준 선물이 아닐까 한다. 세상에는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젊은이는 아련하게 고독하고, 늙은이는 서글프게 고독하다. 부자는 채워져서 고독하고, 가난한 이는 빈자리 때문에 고독하다. 젊은이는 가진 것을 가지고 울고, 노인은 잃은 것 때문에 운다. 젊은 시절엔 사랑하기 위해 살고, 나이가 들면 살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하며 살아도 남은 세월은 너무 빨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