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석창  목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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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읍교회 성도 증가… 변혁․부흥 일어나

목회 열중․민족 깨우침 최선, ‘수차례 옥고’

선천 보신교회가 설립되었다. 먼저 본읍교회 부인 김기반이 와서 열심히 전도함으로 김치원, 김치형, 김윤문, 오치숙, 이용덕 등이 믿어 성 읍내 교회에서 열심히 예배하니 후에 선교사 위대모와 조사 김석창이 와서 교회를 돌아보고 분립했다. 그래서 선천 가물남교회가 분립되었다.

평북노회에서는 그에게 졸업과 동시에 선천 남교회를 개척 설립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했으며, 김석창은 그해 가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 설립한 선천 남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뜨거운 전도의 열정으로 선천읍교회의 성도들이 증가하자 현대식 예배당 건물을 건축했고, 교인도 1천 명이 넘었으므로 교회를 분립하려고 모두의 의견을 물어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교회는 김석창 목사가 목사 안수받은 것을 기회로 선천 남교회와 분립되었다. 본래의 교회는 선천 개울 북쪽이므로 선천 북교회로 하고, 김석창 목사가 분립하는 교회는 남교회로 했다. 이내 남교회의 교세도 북교회를 능가할 만큼 부흥했다.

그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했다. 성도들의 신앙이 향상되게 하려고 성령 충만한 교역자가 되기 위해 영적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선천 개울 남쪽은 일대 변혁과 부흥을 이루었다.

선천에서는 유지요, 양로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에도 큰 공헌을 한 장로가 있었다. 사회, 관청의 요인들과 교제도 빈번했던 그가 술좌석에 앉았다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교회로서 어떻게 하느냐?” 뒤숭숭한 말이 돌았다. 그를 징계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그의 아들들이 출세했으므로 교회가 평안할지 모두 주목하는 때였다.

예배 설교가 끝난 후 당회장인 김석창 목사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섭섭한 당회의 치리 건을 알려드립니다. 우리 교회 박 모 장로는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나 술좌석에 동석했던 것은 사실이므로 교회 규칙상 당분간 장로직을 휴직시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 잘못이 자신에게 느껴져 회개함이 확실할 때에 해벌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그 자신과 그 가족들이 동석했으나 숙연할 뿐이었다. 과거에는 이렇게 치리권이 엄중하게 행사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인 수가 적었고 전도하기도 어려웠으나 교회에서 책벌하는 일은 엄격해 목회자들이 결단으로 교인들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그 직책 고하를 막론하고 징계했다. 후에 그 장로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복했으므로 김석창 목사는 당회를 통과해 교우들 앞에서 해벌을 선언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되면서 김석창 목사는 부회계를 역임했고, 독노회 시에는 회계도 역임했다.

김석창 목사는 목회에 열중하면서 민족을 깨우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선천에서의 3·1 독립운동 사건 때 양준명, 홍성익 등과 함께 선천군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일본 경찰 당국은 평소 사상을 의심하고 있던 김석창 목사를 지목해 그를 구속했고, 그와 함께 모의했던 양쪽 학교의 교사들까지 구금, 평양형무소에 수감했다.

1920년에는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일행이 경성부에 방문해 선천군을 통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목사는 선천 지역 유지들과 회합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함을 알리고자 그 의원단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만세시위를 일으켜 다른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열렬함을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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