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0년 한국선교 역사 속에서 한 사람을 남겨야 한다면 이견없이 언더우드를 꼽을 수 있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 중 아펜젤러는 1902년 일찍 순직을 한다. 알렌은 조기 사임을 하고 외교관으로 활동을 한다. 헤론은 1890년 너무나 일찍 순직했다. 스크랜턴은 1907년 선교회 내부 갈등으로 조기 사임을 하고 한국을 떠난다. 언더우드만이 31년 오랫동안 불 동가리와 함께 넓은 날개(wide wings)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복음, 의료, 교육, 사회선교 등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된다.
1886년부터 활동하던 여성 의사 애니 엘러스(Annie Ellers Bunker)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고 1888년 릴리어스 호톤(Lillias Horton Underwood) 여의사가 명성황후를 돌보던 시의(侍醫)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아무런 대가 없이 헌신적으로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보며 한국 땅에서는 페이크 뉴스가 난무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눈알을 빼서 사진기를 만들고 간을 뽑아 가루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다. 릴리어스 호톤 여성 의료 선교사가 출퇴근을 하노라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곤 했다. 이때 언더우드가 경호를 하며 출퇴근 등 호톤 선교사의 활동을 도왔다. 신뢰와 사랑이 깊어져 언더우드는 8살 연상 호톤 선교사와 혼인을 하게 된다(1889년).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밤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 언더우드는 고종을 위해 헐버트, 에비슨 등과 함께 육혈포를 차고 보초 경호를 서기도 했다. 140년 전 시작된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선교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아들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원한경)는 연희전문학교 교장, 새문안교회 장로로 활동했다.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원일한)는 6.25 참전용사로 6.25 정전회담 당시 통역관으로 섬겼다. 지금도 증손자 피터 언더우드(Peter Alexander Underwood, 한국명:원한석)가 사업차 미국, 호주, 한국을 오고가며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1907년 출발한 독노회 노회장은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이었지만 1912년 출발한 제1대 총회장은 안식년 겸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언더우드가 맡았다.
이 무렵 이때 가지고 들어온 둥근 잎 느티나무 두 그루가 새문안교회, 양평동교회에서 자라다가 수명을 다해 죽기 전 새순을 옮겨 심은 나무가 한소망교회, 새문안교회, 양평동교회, 장로회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자라고 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