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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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선교의 씨앗, 여성 교육과 민족 운동의 발판

한 사람은 전주에서 순교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자로서 대구형무소에서 순교를 했으니 전위렴 선교사가 뿌려 놓은 순교의 씨앗은 호남 지방에 널리 전파되어 박연세 목사를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했다. 그 외에도 전위렴 선교사가 설립했던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은 호남지방을 오르내리면서 민족과 교회부흥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군산 멜본딘여학교와 레이번 선교사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위렴 선교사 안방에서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가 1902년 여학생들을 모아 놓고 가르친 것이 군산여학교 보통과의 출발이었다. 사실 여학생을 모으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남존여비의 사상 때문에 남자는 배워도 좋지만 여자만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레이번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할 때 큰 포부와 이상을 갖고 왔기에 그 꿈을 가난한 어촌 군산에서 펼쳐 나갔다.

군산여학교에 학생들이 점점 모여들자 군산선교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마다 유년주일학교를 실시하게 됐으며, 이들의 신앙 교육을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만 실시한다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각 교회 목회자들과 군산선교부 선교사들은 교회마다 교회 부속 간이학당을 운영했다. 이 간이학당에서 2년의 과정을 마치고 수료를 한 남녀 학생들은 교육을 받은 후 생각이 달라지고 표현력에 변화가 왔으며 그들의 부모는 그들을 군산에 있는 미션학교에 진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로 군산여학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고 일손이 모자라던 때에 뜻하지 않게 엘비 선교사의 지원을 받으면서 같이 활동을 했으며, 학교는 현대식 교육과정을 밟아가게 됐다. 그런데 한참 군산여학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레이번 선교사는 남편의 건강 때문에 더 이상 군산에 머물지 못하고 전주로 이동해야 했으며, 그 여학교는 엘비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이로 인해 엘비 선교사는 갑자기 큰 직책을 맡게 됐다.

1910년이 되면서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는 간이학당을 모두 폐쇄하게 되자, 이에 당황한 군산선교부는 그 관할하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군산여학교로 보냈다. 학생들이 갑자기 군산여학교로 모여들자 시설의 부족함을 느낀 엘비 선교사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고향 교회인 버지니아 주에 있는 렉싱턴 장로교회를 찾아갔다. 이 소식이 렉싱턴 교회 전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알려지자 모금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어떤 가정주부는 자신의 끼니를 거르면서 돈을 모으기도 했고, 생전 거리에 나가 장사를 해본 경험도 없는 가정에서도 물건이 될 만한 옷가지 등 여러 종류의 가재도구를 들고 나가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금운동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자 그 지역에 있는 멜본딘여자대학에까지 번지게 됐다. 이 학교 학생들이 군산여학교를 돕자는 캠페인을 펼치자 전 학생이 아침굶기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아침 한 끼니를 현금으로 계산해 군산여학교에 전달했다.

엘비 선교사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의 남편 부위렴 선교사와 그 외 군산에서 선교하는 모든 선교사들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군산선교부에서는 아예 미국 남장로교 소속 교회 교인들 중 설계자에게 학교 설계도를 부탁했으며, 그 설계도가 한국에 도착하자 부위렴 선교사는 친히 진두 지휘를 했다. 건축은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여기에 군산 교인들도 참여했다. 이들의 수고로 군산여학교는 현대식 건물을 갖게 됐으며, 군산선교부에서는 멜본딘여자대학 학생들의 그 따뜻한 정성에 너무 감사해 멜본딘여학교로 개명했다.

군산 구암에 현대식 교육기관이 세워지자 전북 지방의 새로운 여성 교육 명문 기관으로 발전해 가면서 군산을 비롯해 옥구, 김제, 부안, 익산, 그리고 충청남도 일부인 부여, 청양, 보령, 한산, 임천, 장항 등 여러 지방의 여학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학교 역시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들이 여학생, 남학생 구별없이 과목을 맡아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여학생들은 서울로 진학하기도 했고, 농촌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해 옥고를 치른 학생들도 생겨났으며, 그후 이 학교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부위렴 선교사와 엘비 선교사

전라도 선교에 빼놓을 수 없는 선교사가 부위렴과 엘비이다. 부위렴 선교사는 군산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익산, 김제 일부, 부안 지방을 맡아 선교에 임했는데 그의 전도 스타일은 다른 선교사와는 많이 달랐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부흥복음성가단이 조직됐는데, 이 부흥복음성가단이 먼저 나가 나팔을 불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면 동네 아이들은 물론 부녀자, 장년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흥복음성가단 뒤를 따라 나섰다. 일정한 장소에 천막을 쳐놓고 모여든 사람을 앉게 한 후 즉석에서 그 유창한 한국어로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이 돼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고자 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설립된 대표적인 교회가 군산시에 있는 발산교회였다. 이 교회는 천막을 치고 출발했다.

부흥사 출신인 그가 군산 영명학교 교장으로 부임할 때도 가장 치중했던 것이 관현악단을 조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음악교사를 두고 학생들에게 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으며, 이 학생들은 부위렴 선교사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성가를 불러 주었다. 이렇게 해서 훈련 받은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개교회에 가서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했고 이러한 일은 군산선교부 관할하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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