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1892-1944)는 황해도 장연 소래에 한국개신교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는데 공헌한 기독교 3대째 이르는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개신교의 독실한 신앙적 지도자다. 그는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동경여자신학원에서 영문과를 수학하면서 유학생들에게 2.8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문을 일본 여성으로 위장해 기모노 옷에 숨겨 국내에 비밀리에 반입해 유포했다. 그리고 3.1 독립운동 당시 적극 가담했으며, 특히 애국부인회를 주도하면서 앞장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중국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다. 1923년 미국으로 도피해 10년 간 미국에서 수학하며 교육을 받아 실력을 양성했다. 그 후 귀국해 원산 마르다 여자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하다가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해 1943년 폐교되었다. 1944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평양 기독병원에서 병환으로 3월 13일 향년 53세에 생을 마감했다.
3.1 독립운동은 지역, 성별, 종교를 넘어 온 국민이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그 중에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앞장서 운동을 조직하고 선동하고 선두에 섰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눈에 가시처럼 여겨 교회를 특히 핍박했다. 일본 헌병대 조사에 의하면 독립운동에 가담한 1만 9천525명 중 개신교 교인이 대다수라고 했으며, 그 중에도 여성 가담자의 지도자가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이때 김마리아는 독립운동에 앞장서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수학하면서, 그리고 미국에 망명 중 학업 중에도 그는 거처하는 곳마다 독립운동을 했다. 특히 1928년 뉴욕에 있는 여자 유학생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귀국 후에 1933년 장로교 여전도회(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7대 회장으로 4년 간 역임하면서 여전도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김마리아는 리더십이 강했으며 오직 여성들의 실력양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도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동상이 모교 정신여중․고학교 교정에 건립되었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