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복음과 찬송의 기적적인 울림
조어대에서 복음송 · 찬송가의 역사적 순간
긴장과 반전 속에서도 이어진 복음의 전달
나는 통역과 함께 그분에게 가서 “저쪽 책임자는 허락했는데 부주석님께서도 합창단이 노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확신한 ‘예스’는 아니었지만 약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지체하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마자 100여 명의 어머니합창단이 무대로 올라가 합창으로 춤추며 찬송과 복음송을 불렀다. 중국인민대회당에서 목사님이 복음 선포를 한지 얼마 안 돼 합창단 찬송이 울려 퍼지는 기적을 조마조마해하며 즐겼다. 참석한 모든 중국인들은 싱글벙글 좋아하고 중국 측 주관자들은 사색이 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오후에는 컨벤션센터에서 분야별로 강의가 있었다. 강사로 나선 감리교 장광영 총감독(약수교회)은 합의된 원고를 집어 던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중국 책임자는 통역 내용을 듣고는 “지금 당장 중지시키지 않으면 마이크를 끄겠다”고 했다. 장 목사님은 마이크 전원이 꺼진 뒤에도 계속 큰 소리로 설교를 했다. 책임자는 다시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곧바로 중국 공안이 들이닥쳤다. 공동 사회를 맡았던 내가 나서서 “만약 장 목사를 체포하면 우리 팀 모두 철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겨우 장 목사님 먼저 공항으로 보내서 한국으로 돌아가시도록 하는 것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저녁 만찬은 ‘조어대(釣魚臺,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우리 측 400여 명과 중국 측 100여 명이 함께 했다. 조어대는 중국을 찾는 세계 국빈들이 머무는 곳이다. 본래 그곳 식당은 500여 명이 들어갈 장소가 아닌데 특별히 여러 홀을 터서 만찬장으로 꾸몄다고 했다.
만찬 시간이 반쯤 지나고 있을 때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가스펠 송을 신나게 부르기 시작했다. 좌중을 모두 일어서도록 하고 서로 손잡고 춤추게 하면서 돌아다녔다. 100여 명의 중국 고위 관계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워낙 친화력이 좋은 최 목사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다 같이 일어서서 손잡고 춤을 추며 호응해 주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우리 일행 중 미국에서 온 한 여성 성악가가 ‘주기도문’을 영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다른 중국인들은 모르지만 진행 주최 측 책임자들은 성가곡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두 노래에 심취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국인민대회당에서 곽선희 목사님이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를 하고, 그 장면이 중국 전역에 TV로 중계되고, 중국을 찾는 국빈을 영접하는 조어대에서 찬양과 주기도송이 울려 퍼진 것까지 모두 중국 5천 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들이 벌어졌다.
다음날부터 컨벤션 부스에서 진행된 투자유치 설명회에서도 우리 방문단 중 여럿이 준비도 없이 강사로 나서야 했다. 다행히 우리 일행에는 건설, 전자, 섬유, 무역, 기계, 화학, 농업 등 각 분야 종사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통역사로 조선족 중국인 청년들이 100여 명 동원돼 있었다. 이 통역사들은 정보 파악 및 감시 목적으로도 배치된 듯했다. 갑자기 뽑힌 강사들은 자기 전문 분야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도 호응이 굉장히 좋았고 강의 후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달됐다. 이때 인연을 맺은 중국 최고위 인사 몇 명은 최근까지 해마다 우리 집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온다. 이때부터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이 ‘부흥회 아닌 부흥회’는 그렇게 이후 중국 선교의 소중한 발판이 됐다. 당시에는 긴장감 때문에 다 감지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사건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내가 온전히 끌어안고 있었던 재정적인 문제도 기가 막히게 해결됐다. 4박 5일의 일정 동안 412명의 방중단 일행은 새벽마다 호텔의 별도 공간에 모여 곽선희 목사님 인도로 새벽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예배가 끝난 후 류태영 장로가 예정에도 없던 광고를 한다고 일어나더니 “여러분, 이번 행사의 계약 중도금으로 박래창 장로가 부인 이미순 권사가 적금 탄 1억 원을 내서 우리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라고 했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중국 측에 지불해야 할 20만 달러(1억 9천만 원)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헌금을 내거나 혹은 한국에 돌아가서 헌금을 하겠노라고 작정하기 시작했다. 다들 얼마나 후하게 냈는지 필요한 금액을 채우고도 1억 원이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남은 고민까지 깨끗하게 해결됐다. 남은 1억 원은 훗날 소망교회 집사님이셨던 고 허영섭 녹십자 회장님이 주신 3억과 다른 집사님들이 주신 2억까지 합쳐져서 소망교회가 수년간 진행했던 중국 자어교회 전도자들을 위한 신학서적을 출판, 배포하는 사역에 귀중하게 쓰였다. 중국학자들이 쓴 신‧구약개론, 로마서, 요한복음, 강해서 등의 신학서적과 교육지침서를 마카오에서 출판해 하남성, 귀주성 등 오지에 있는 가정교회 지도자(전도자) 5천여 명(5천 개 교회)에게 공급한 사역이었다. 그 당시는 중국 서점에서 신학서적을 구할 수 없을 때이다.
이 경험은 그 후 소망교회 북방선교부가 외교통상부 산하에 동북아 교육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후부터 소망교회 북방선교부장으로서 본격적으로 북방선교에 매진했다. 류태영 장로, 옥수수 품종을 개량한 경북대학교 김순권 박사, 씨감자 품종을 개량한 카이스트 정혁 박사, 새마을연수원장을 지낸 정교관 박사와 함께 1996년부터 8년간 중국 오지 30여 곳을 구석구석 다니며 빈농 지도자들에게 한국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을 하고, 농과대학 농업연구소 등과 협력해서 중국에 새마을교육(신 농촌운동)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그 후 북경에 새마을운동 지원본부를 두고 중국 전역에 순회교육 사업을 10년여 동안 계속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