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이야기] 어머니의 ‘거룩한 협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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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

1년 후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학습능력은 떨어졌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아주 확고했다. 매일 새벽 기도에 참석했고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전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내가 맡았던 주일학교 아이들 수가 마흔 명이 넘었다.

어렵게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됐지만, 워낙 기초가 부족해서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꼴찌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다. 마음을 잡고 공부하려 했지만 기초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학업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고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했는데 세 번만에 겨우 합격했다. 그때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던지 폭삭 늙었다. 어딜 가도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많게 보았다.

한번은 나보다 열세 살 많은 형 친구가 우리 집에 왔다가 나를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나도 같이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형인 줄 알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때 늙어 보이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아직도 내 나이보다 다들 열 살은 많게 본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스물세 살에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다. 또래 친구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였다. 독학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성적이 신통치 않아 야간대학에 지원했다. 그런데 1차에 낙방했고 2차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대입에 실패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절박해졌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야간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대학 지원 마지막 날, 아침부터 눈치작전을 펼쳤지만 가능성이 있는 학과는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원율이 가장 낮은 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게 바로 ‘의상학과’였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남자가 의상학과에 다닌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군대에 가야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떨어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 낙담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한 명이 등록을 하지 않아서 결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입학은 했지만 여자들과 함께 바느질을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상학과에 남학생이 네 명이나 있었다. 그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모두 ‘앙드레 박’, ‘앙드레 최’가 되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온 학생들이었다.

그 후로 나는 밤마다 재봉틀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항상 작품을 만들지 못해서 쩔쩔맸고 과제 마감 때는 여학생들이 버린 실패작들을 주워 제출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대학 생활이 힘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2학년 때는 영문학과로 전공을 바꿀 수 있었다.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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