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좌] 부활 신앙의 기원과 부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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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새로운 견해 :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 <3>

나와 당신의 ‘마지막 날’은 언제인가? 나와 당신의 생애는 언제 끝나는가? 대답은 오직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시간이다. 만약 우리의 주검이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태워진다면, 죽은 자들의 혼이 이미 부활했고 깨어났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혹은 우리가 그렇게 확신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립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시간은 우리가 부활하는 시간이다. 만약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날 것이다. 죽음의 고통은 영원한 생명으로 탄생하기 위한 고통이다. 만약 우리의 주검이 모든 신체와 함께 죽고 부패한다면, 우리가 영위했던 모든 생명, 우리의 살아 있는 혼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부활한 새 몸(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생명력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는 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변모된’ 몸과 같아질 것이다. 우리의 새 몸은 하나님이 미래의 세계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죽은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몰트만은 특히 바울의 신앙을 전면에 강하게 내세운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새로운 몸’이란 무엇인가?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은 바울이 제기하기 시작한 질문을 제기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고전 15:35) 분명히 바울은 예컨대 신체가 없는 영혼의 불멸에 관한 이론처럼 인간이 죽음 후에 신체가 없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바울은 자연 속의 죽음과 생성을 가리킨다.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고전 15:36)

낱알을 뿌리고 땅에 씨앗을 심으면, 땅에서 아름다운 꽃이나 큰 나무가 생겨난다. 낱알은 하나의 낱알이기를 그치고, 바울이 생각하듯이, 그것은 “죽는다.” 그리고 다른 낱알의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 낱알은 비옥한 땅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바울은 영원한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자연적인 신체의 죽음과 신체의 부활을 유비로 끌어온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고전 15:42-44) 썩어짐, 비천함, 약함은 사람의 연약한 신체를 가리킨다. 만약 심고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신체는 불멸과 영광과 능력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싹이 되는 생명을 얻게 된다. 

몰트만는 씨 뿌리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생명은 누려야 한다. 생명은 미래를 위해 바쳐야 한다. “만약 너희가 생명을 버리지 않는다면,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졌기 때문에 누리지 못한 생명이 매우 많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희망으로 가득한 생명이고, 그래서 심어지고 바쳐진 생명이다. 비옥한 땅은 형제 전쟁과 인간 살상으로 인해 매우 많은 피를 마셨다. 평화의 봉사와 정의,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과 평화 창조와 치유를 위한 투쟁은 하나님의 나라를 땅에 뿌리는 일이다.    

부활의 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새로운 몸인가, 아니면 이 죽을 생명이 변화한 몸인가? 온 생명이 부활하고, 치유되고, 변모한다. 모든 생명은 생명의 형태와 생명의 역사를 자신의 몸에 새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고전 15:38) 바울은 동물, 애완동물과 들짐승, 물고기, 땅, 하늘의 해와 달과 별에 관해서도 말한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창조주의 기쁨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광’을 아름다움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피조물이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8장 19-39절에서 허무한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에 관해 생각한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롬 8:20.22) 이 사멸할 창조는 새롭고 불멸하는 창조의 ‘배아’인가? 그렇다면 창조의 사멸은 부활과 불멸하는 생명과 이어지는 ‘죽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소멸과 생성’은 죽어감과 우주적인 죽음의 강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생명의 강으로 흘러간다. 

바울은 우리가 ‘사멸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썩을 것’이라고 부른다. 살아 있는 것은 죽고 썩는다. 그러나 예수의 썩지 않았던 주검은 부활했다. 바울은 썩을 것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을 편다. 1.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2.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53) 현세와 내세 간에는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 그러나 내세로부터 현세를 향해 연속성이 창조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고전 15:54) “주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사 25:8) 바울이 자연스러운 ‘죽음과 생성’을 인간 생명의 죽음과 깨어남을 위한 비유로 사용한다면, 이와 동시에 인간의 미래를 모든 ‘썩을 존재’의 미래로, 모든 생명체의 미래로 확장하기도 한다. 바울은 인간의 미래를 모든 생명체와의 ‘지구적인 연대’와 결부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서(8:22.23)에서 몸의 구원을 바라는 인간의 ‘탄식과 갈망’과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갈망’의 연대성을 천명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생명은 피조물을 받아들인다. 새 땅은 모든 생명체의 일어남과 깨어남과 함께 시작될 것이며, 인간의 깨어남과 일어남과 함께 풍성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다시 돌아오고 일어날 것이다. 만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물은 완성될 것이다.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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