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른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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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에게도 대학 진학 기회를…

내가 숭실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숭실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 해 군사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가 꿈꾸어 오던 대학 진학에 크나큰 장애물이 놓여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군사 정부는 사회 혁명의 일환으로 교육 혁명도 단행했다. 그 당시 대학 입학을 하려면 국가 고시에 응시해야 했다. 그때 국가 고시는 300점 만점이었는데 필답고사가 250점에 체력장이 50점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험 때가 되어 원서를 제출하자 난데없이 기각 통보가 날아왔다. 현행법상 시각장애인은 더 이상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누가 감히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서겠는가?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내 꿈과 학문의 길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약속한 목사가 될 꿈도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암담한 생각으로 기도만 할 뿐이었다. 바로 그 시간 나의 마음속에는 한 가닥 희망의 불빛이 비쳐 오기 시작했다. 절망과 죽음의 늪에서 탈출에 성공한 내가 아닌가. 어떠한 난관도 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새로운 성공의 길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날 등교하는 대로 담임 선생님과 교장실을 방문했다.

“제게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문교부에서 안 된다고 통보가 오지 않았는가?” “교장 선생님, 제게 이 일을 맡겨 주시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제게 모든 것을 맡겨만 주십시오.” “도대체 학생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러는가?”

“방법적인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습니다.”

“허허허, 이제 보니 김선태 군에겐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데가 있었구먼. 어디 알아서 해보게나.”

나는 학교장으로부터 일단 허락을 받고 왔지만, 내심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후 나는 문교부를 찾아 나섰다. 당시에 군인들이 문교부를 장악하고 있는 까닭에 정문을 통과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민간인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러니 교복에 학생모를 쓰고 책가방을 든 나는 더군다나 정문을 통과해 문교부 장학관실로 가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혜가 생겼다.

정문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사탕과 빵을 사다 주고 읽을 수 있는 잡지를 사다 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친숙해져서 문교부를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국가고시를 담당하는 최 장학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도 대학에 갈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장학관 회의가 열렸다네. 그러나 현행법상으로는 불가능하고 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 진학할 길이 없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시각장애인에게는 학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안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혁명한다고 공포해 놓고 독재 정치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최 장학관도 막무가내였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들을 대학 공부 안 시킨다고 하던가? 대한민국 교육법이 그렇다는 것일세.”

“그런 부당한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법이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합니까? 또 법이란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까? 바로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만들어 낸 교육 시행령이 아닙니까?”

“아무튼 안 되네. 그러니 헛수고 말고 돌아가게.” “좋습니다. 오늘은 배가 고파 이만하고 갑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나는 이튿날도 똑같은 시간에 문교부 대학교육국장 앞에 섰다.

“저 왔습니다.” “임마, 어제 말했으면 됐지 뭘 또 와.”

“제가 대학 가기 위해서 오늘까지 싸워 왔는데 어떻게 포기하라고 그러십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나는 최 장학관 책상 앞에서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었다. 보다 못해 최 장학관도 소리쳤다.

“바쁜데 빨리 가. 임마.”

나는 시각장애인도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1, 2, 3학년 교과서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입에서 거품이 나도록 영어 책을 줄줄 외웠다. 문교부 직원들은 안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그 다음날도 문교부를 찾아갔다. 내가 대학교육국으로 들어서자 한 직원이 웃으며 소리쳤다.

“최 장학관님. 저기 또 반가운 손님 오십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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