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은 포에니전쟁(264-146 B.C.)에서 승전한 이후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아프리카 북부를 비롯해 지중해 연안지역의 정복지에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다. 로마는 점령한 토지를 국유화했으나, 권력과 유착된 유력자들은 공유지(公有地)를 선취하기도 하고, 국유지를 점령, 사유화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이들 유력자들은 전쟁의 결과로 얻은 많은 노예들을 투입해 노예제에 입각한 대농장제도(Latifundium)를 실시해 값싼 농산물을 대량생산했고, 기존의 자작농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 자작농들은 토지를 값싸게 대지주들에게 매도하고 도시로 진출해 무산자(proletaria)로서, 도시 빈민층을 형성함으로써 사회문제가 대두했다.
로마의 호민관 출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주장하다가 개혁을 반대하는 원로원의 보수세력에 의해 살해됐고(B.C. 133), 그의 추종자들 300여 명도 살해됐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가 형의 뜻을 이어서 농지개혁과 곡물법개혁을 시도하다가 개혁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무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려는 도중에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서,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공화국의 적으로 몰려 탄압을 받자 가이우스는 자살(B.C. 121)했고, 그의 추종자들 3천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서 귀족이 지지하는 술라(Sulla) 세력과 민중을 지지하는 마리우스(Marius) 세력 간의 충돌로 심각한 국론분열과 분쟁이 벌어졌다.
근대 시민혁명 중에서 세계사적 영향을 주고 있는 혁명은 프랑스혁명이다. 이 혁명이 발생한 원인은 구제도인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당시 프랑스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강령은 자유, 평등, 박애였다. 이중에서도 가장 강조되는 것은 중세사회의 봉건적 불평등 사회를 청산하고 평등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배치되는 세력들은 청산의 대상이 됐다. 그런 주장 하에 단두대에 무려 1만 6천여 명이 희생됐다. 프랑스혁명 때, 국민의회에서 혁명파인 자코뱅파(Jacobins)는 회의장의 좌측에, 왕당파인 지롱드파(Girondins)는 회의장의 우측에 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좌익과 우익의 기원이 되었다. 좌익에서는 평등을 내세우고, 우익에서는 자유를 주장했다. 이들 양파의 갈등은 많은 피의 비극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프랑스혁명 때 주장하던 이성에는 영원성과 신과 관련된 순수이성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이런 사상을 받아들인 헤겔은 “인류 역사는 자유의 진보과정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반기를 든 칼 마르크스를 중심한 유물사관론자들은 투쟁을 통한 평등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헤겔리즘(Hegelism)과 평등을 강조하는 마르크시즘(Marxism)은 평행선을 달리며 갈등과 상호투쟁을 계속하다가, 1991년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탈이념을 추구하게 됐다. 중국도 실사구시의 수정 공산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게 되면서 오늘날은 이념을 넘어 국가실리주의적 실용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공산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고집함에 따라 한반도는 냉전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한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부인하고 한민족의 숙원인 민족통일을 가로막을 수 없다. 창공을 날기 위해서는 오른쪽 날개도 필요하고 왼쪽 날개도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공존·공영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공동과제이다. 이제 남·북한은 자유를 지향하는 오른쪽 날개와 평등을 지향하는 왼쪽 날개가 함께 미래로 창공을 향해 비상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