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 장학관 앞으로 가 꾸벅 절을 했다.
“저 또 왔습니다.”
최 장학관은 이번엔 아예 외면했다.
나는 매일같이 찾아갔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무려 서른세 번이나 찾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가도 문교부는 꿈쩍도 안 했다. 나의 행동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나는 이판사판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기로 하고 서른세 번째 되는 날 아침 시퍼런 칼을 가슴속에 품고 최 장학관을 찾아갔다.
“정말 최 장학관님은 시각장애인의 요구를 거절하실 겁니까?” “저 자식이 얼마를 얘기해야 귀가 뚫리려나.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그는 책상까지 치며 분통을 삼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속에 품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최 장학관, 당신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을 후진국으로 끌어내리는 적이요. 그런 사람이 대학교육국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차라리 저와 같이 죽음의 길로 갑시다. 그래야 유능한 인사가 나와 불평등한 교육법을 뜯어 고쳐서 시각장애인에게도 대학 입학을 허락할 것 아니겠소.”
나는 칼을 꺼내들고 최 장학관 앞으로 돌진했다.
“얏, 칼 받아라.”
최 장학관은 겁이 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여보게 그 칼이나 치우게 응? 어서.”
“칼을 왜 치워. 당신하고 나하고 죽어야지.”
나는 마치 칼을 쓰는 사람처럼 최 장학관을 쫓았다. 문교부 직원들이 앞 못 보는 사람이 칼을 들고 휘두르니 겁에 질리고 무서워서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갔다. 삽시간에 일어난 사건이 문교부 출입 기자들에게 알려졌다. 기자들은 몰려들어 사진을 찍으며 부추겼다. “학생 말이 맞아. 도대체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을 대학교육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김선태 군 만세야, 만세.“
불가능은 없다
이튿날 조간 신문엔 나의 기사가 사회면을 가득 메웠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후 어디를 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버스를 타도 승객들이 “저 학생 신문에 나왔어” 하면서 나에게 다가와 “신문에서 봤습니다. 꼭 성공하세요” 하고 격려해 주었고 안내양은 차비도 받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식당에 가서 식사해도 주인이 돈을 받지 않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도 무료였다. 그야말로 몇 개월간 스타가 되었다.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서 여학생들로부터 사귀고 싶다는 편지도 많이 날아들었다. 문교부 장관은 대학 당국에 특명을 내려 시각장애인에게도 대학 입학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도록 했다. 나는 서른세 번의 도전 끝에 불가능을 가능케 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으로서 총칼과 맞서 이기고 일반 대학인 숭실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억지로 시행령을 따내긴 했으나 체능 시험은 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시험에 응시했다. 예상했던 대로 예체능 시험이 허락되지 않아 학과 시험에만 점수가 나왔다.
숭실대학교에 들어가던 날
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숭실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기로 했다. 그 학교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드디어 나는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흐르는 눈물이 나의 얼굴을 흠뻑 적셨지만, 이 감격을 막상 함께 나눌 형제 자매나 부모님은 없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온갖 고생을 통해 얻어 낸 성취가 아닌가.
나는 합격 통지서를 가지고 노량진에 내려서 사육신묘에 갔다. 내 눈에 한강물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 한강을 향해 미래를 설계하면서 환희에 찬 눈물을 한껏 흘렸다. 쌀쌀한 겨울 날씨였지만 나는 그곳에서 두어 시간 앉아 있다가 내려와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숙소로 갔다.
입학은 했으나 기숙사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숭실대학교 기숙사 사람의 자세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숭실대학교 명예 총장이신 옥호열(보콜) 선교사의 도움으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 방에는 아래위로 된 침대 두 대가 있어 네 명의 학생이 함께 기숙할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해 같은 방에 기거하던 네 명의 졸업생들은 모두 훗날 성직자가 되었다. 그 중의 선배 한 분은 지금 인도네시아로 간 김윤석 선교사님이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했고 신앙생활과 학문생활을 항상 균형 있게 해나갔다.
숭실대학교의 면학 분위기와 종교활동은 나의 20대 지성과 신앙을 조화시켜 준 생명의 산실이 되어 주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