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Q] 왜 완전하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고, 아담이 죄짓지 않도록 만들지 못하셨을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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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짓도록 하나님은 왜 지켜만 보셨나?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셨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 26)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생명과 인격을 주셨다. 주지 않았다면 공중의 각종 새와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짓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이 땅을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에게 생명나무나 선악과에 관해 소개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담과 대화 또는 명령 또는 언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보시기에 좋은 모든 것들을 아담이 관리하고 능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엄청난 사랑을 담은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자유의지로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훈련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길 원하셨다. 선악을 아는 그 나무를 에덴동산 한가운데 두신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함이었다. 동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 중심에 있음을 의미한다.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일이었다. 매일 보는 그 선악과를 따지 않고 지켜내는 그 일이 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순종이며 절제이다.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자신의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이 주어진 것이나, 자기 마음껏 사용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의지의 자율’이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란 단순히 욕망이나 충동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이성적인 도덕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의지의 자율’이다(저서-실천이성비판). 아담이 이 자율의 절제로 욕망을 제어하고, 자유의지를 선용해서 점진적으로 신앙의 성숙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결과적으로 이 절제에서 실패했다. 

그러면 “왜 지켜만 보고 계셨을까?”하는 것이다. 아담은 ‘행위언약’을 맺었고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의무 아래에 선 자가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담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우리의 인격을 짓밟으시지 않으시고 그 순간마다 우리에게 물으셨다. 

 요나가 곧장 니느웨로 가도록 강제할 수도 있으나 끝내 요나를 통해 니느웨가 회개하도록 하셨고 그 공을 요나에게 돌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담이 죄 범하는 그 일을 미리 아시면서도 짐짓 간과하신 것은 바로 그 아담을 위한 일이었다. 아담의 행동 다 아시고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하기 위함이다.

결국 아담은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서야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냥 지켜보신 것은 아담과 깊고 참된 그 사랑을 이루시려는 뜻과 태초부터 우리에게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해서였다. 완전케 될 훈련이 필요했으며 그 도구로 사용된 것이 사탄의 유혹이다. 아담의 유혹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막이 없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호막이 둘러처져 있어 감사하다. 다만 이 사탄의 유혹으로 우리는 고난을 겪을 뿐이다. 그 고난의 혹독함을 통해 욥이 고백했듯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는 그 고백을 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오상철 장로

<시온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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