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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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렴 선교사와 부흥복음성가단, 한국 선교·교육 유산

한때 총회 진흥부(현재 전도부에 해당)에서는 100만구령운동을 전개한 일도 있었다. 전라북도에서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이 운동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부위렴 선교사는 이미 조직된 부흥복음성가단을 베테랑급으로 교체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현제명을 비롯해 송기두, 양관해, 이우석, 나기용, 고석모 등이었다. 이중 나기용은 전주 신흥학교 음악교사이기도 했다. 물론 단장은 부위렴 선교사였다.

이렇게 부흥복음성가단이 조직되면서 1918년 봄, 천막 하나를 싣고 부안 지방을 순회하게 됐는데 부안 읍내에 자리 잡은 이들 일행은 전도집회 2시간 전부터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면서 열심히 악기를 연주했으며 가끔 이들은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기도 했다.

“여러분들, 오늘밤에 오셔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 보세요.”

이렇게 외치고 나면 전도 강연을 듣기 위해서 부안 읍내로 오는 사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모여들어 어느덧 300명이 쉽게 모였다. 사람들이 천막 안을 가득 메우면 복음성가단 단원인 현제명은 앞으로 나와 복음성가를 불렀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이 복음성가로 장내가 숙연해졌다.

“이제 부위렴 선교사가 나오셔서 전도 강연을 하겠습니다.”

“방금 소개받은 부위렴입니다. 오늘밤 여러분들은 참으로 귀한 장소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부위렴 선교사의 강연은 끝이 없었다. 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청취하는 청중들의 모습은 진지하기만 했다. 하루가 끝나고 그 다음 날을 맞이하게 되면, 부위렴 선교사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인사를 받았다.

“미국 아저씨, 오늘밤에도 전도 강연을 합니까?”

“네, 저는 선교사입니다. 오늘밤에도 많이 오셔서 좋은 이야기 많으 들으시고 예수 믿으십시오. 다 복받자고 하는 일입니다.”

부위렴 선교사는 군산선교부에만 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그의 명성이 알려졌으며, 심지어 부산에 있는 일본인교회에까지 알려졌다. 당시 전주 일본인교회에서 목회하던 도가라 목사가 부산 일본인교회로 시무지를 옮기자 부위렴 선교사를 부산까지 초청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의 명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부흥복음성가단의 단원들 중 고석모, 이우석은 목사가 됐으며, 송기두, 양관해는 장로가 됐다. 그리고 현제명은 한국 근대음악의 대부가 됐다.

부흥복음성가단과 부위렴 선교사

이렇게 학교일과 교회일, 부흥전도회, 달성경학교 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한 부위렴 선교사는 미국 놀포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합덴시드네대학을 졸업하고 이어서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9년 놀포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즉시 한국 선교사로 부임한 이래 강제 출국할 때까지 오직 군산선교부를 지키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군산 영명학교가 첫 시련을 당하게 됐으며, 그 후 일제는 적국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선교사를 강제 출국시켰다. 이때 1940년 부위렴 선교사도 부인 엘비 선교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그후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를 당한 군산 남녀 학교에 대한 충격 때문에 1941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엘비 선교사는 버지니아 주에서 출생했으며, 1888년 멜본딘대학을 졸업했다. 10년간 교사로 활동하다가 1899년 12월 5일 군산선교부에 도착해, 군산 멜본딘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후 학교 시설의 확장을 위해 친히 모교를 방문해 건축기금을 모금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했다. 이 일로 멜본딘 대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로 군산여학교는 멜본딘여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한편 이 학교의 신축은 그의 모 교회인 렉싱턴교회 여전도회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뤄졌는데, 엘비 선교사의 피와 땀으로 설립된 멜본딘여학교는 1937년 폐교와 함께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다만 남학교였던 군산 영명학교는 1946년 8월 9일 군산노회에서 복교하기로 결의하고 그 위원으로 이창규, 계일승, 김윤식, 이재봉, 도희수, 심학윤 등이 선임됐다. 이들은 곧 선교회에 복교를 요청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노회에서 학교 건물과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고 1948년 9월 1일 새학기를 맞아 복교했다. 이때 타요한 선교사가 교사로서 이 학교를 도왔다.

한편 군산노회에서는 통합 측과 합동 측의 교단 분열로 군산 영명학교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되자 그 학교 건물과 대지를 고려합판 제지회사에 매각하고 거기에서 얻은 재원을 호남기독학원에 편입해 군산전문대학을 설립했다.

건물과 대지를 매입한 고려합판 제지회사에서는 군산 영명중‧고등학교를 군산 제일중‧고등학교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끝내 일반인의 경영으로 찬송소리가 그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옛날 명문 군산 멜본딘여학교를 복교하기 위해 1965년 4월에 군산 개복교회 내에 있는 가건물에서 멜본딘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하고 그 전통을 이어갔지만 역시 얼마 후에 군산 개복교회와도 관계가 끊어져 사립학교가 되고 말았다.

만일 강제로 출국했던 부위렴 선교사와 엘비 선교사가 해방 후에 군산에 왔으면 이 두 학교는 옛날 명문으로서 명맥이 유지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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