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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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역할로 큰 변화를 이루어 내다”

중국 지방 지도자들 교류… 선진 농업 체험․신앙 나눔

대전신학대학교 건축 사역, 불가능을 ‘가능’으로

중국 지방정부의 중간 지도자들인 수강생 중 우수한 학생을 매년 25명씩 선발해 한국의 선진적 농업 체험과 산업 시찰을 시켰으며 교회 예배에도 참여시켰다. 주중 대사관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소망교회가 했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역과 섬김의 지경을 점점 넓혀 주셨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모든 일에 내가 참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유능한 소망 인재들이 팔을 걷고 주위로 모여 주었기 때문이다. 소망교회가 가진 귀중한 자원인 각 분야 전문가 성도들은 내가 어려움을 고하고 도움을 청할 때마다 흔쾌히 나서줬다. 책임을 맡은 내가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점이 명백했기 때문에 이런 협력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모인 능력들은 어떤 전문가 집단도, 기업도, 국가도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착착 진행했다.

부족한 리더를 앞다퉈 도와주려고 했던 그 순전한 믿음의 소망교회 성도들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작은 역할로 큰 사역을

나는 2002년에 대전 장신대학교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이 일도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불가능해 보이는 책임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능력이 있고 없음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한 명, 일을 책임지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건 정치판에서건 서로 자기가 잘할 수 있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있지만, 중요하되 가능성이 적은 일은 외면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오히려 등 떠밀려 맡은 사람에 의해 일이 이뤄지곤 한다.

대전신학대학교 이사회는 총회 파송 이사, 충청권 노회 파송 이사로 구성된다. 강남노회에서 같이 섬기던 정행업 목사가 1990년 대전신학교 10대 학장으로 부임했을 때 사무기기 일부를 기증한 인연으로 내가 학교 유지 이사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 밖에는 아무 연고가 없었음에도 이사직을 3번이나 연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2대 문성모 총장이 부임하면서 숙원 사업이던 학교 건축 계획이 수립되고 건축위원회가 조직되면서 내가 건축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대전신학대학교는 1954년 8월에 설립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을 세 차례 역임한 고 이자익 목사가 초대 교장이었다. 50년 넘은 전통을 가진 학교인데 학교 건물이 열악한 탓에 교육과학기술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정식 ‘대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있었다. 총장과 이사장이 바뀔 때마다 매번, 수십 년간 학교 건축이 안건으로 나왔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미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사회에서 이 안건이 나올 때마다 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별 수 없이 소극적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내가 참석하지도 못한 이사회에서 나를 건축위원장으로 선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당황스럽기도 했고 부담스러웠다. 이사를 사임할까도 생각했지만 적당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그것도 어려웠다.

2002년 1월, 첫 건축위원회가 소집됐다. 마침 교육과학기술부의 기준이 완화돼서 현재의 부지 수준에 맞는 건물만 건축하면 4년제 대학교 인가가 가능하다고 했다. 건축 비용은 80억 원으로 추산됐다.

문제는 가용기금이 말 그대로 ‘제로’라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들이 개교회 중심 성향으로 굳어져 있다 보니 대형 교회 한 곳이 80억 원을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교회 연합 사업으로 그런 금액을 모금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문 총장은 “지난 2년간 학생, 교직원들과 함께 눈물로 특별 새벽기도회를 해왔습니다. 어떻게든 올해 안에 건축을 시작해 2년 후인 2004년에 완공할 것이고, 그 안에 기금을 모으겠습니다”라고 비상한 결단으로 말했다. 이미 학생들이 먼저 건축헌금을 시작했고 교직원과 교수들이 급여에서 일정액씩 헌금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참석한 충청권 노회와 교회 대표들의 얼굴을 보니 찬성도 반대도 읽을 수 없었다. 워낙 오랫동안 거론되어온 문제였기 때문에 절박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파송 이사들은 3년 임기가 끝나면 떠나버린다. 더구나 당시는 IMF 구제금융 후유증이 계속되던 때라 더욱 모금이 어려웠다. 충청권을 비롯한 중부권 교계의 온건한 분위기를 감안해도 2년 만에 80억 원을 모은다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분명히 나왔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는 ‘총장이 저렇게 수고하는데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할 기회가 돌아왔을 때 나는 문 총장을 응원하는 심정으로 밝게 말했다.

“저는 소망교회에서 건축위원장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야의 전문가인 장로님, 집사님들과 함께 대책을 세워보겠습니다. 당장 설계를 시작하고 비용을 정확히 내봅시다.”

그러자 문 총장의 얼굴은 밝아졌고, 이사들의 표정에서도 일말의 기대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소망교회에 출석하는 법무사, 세무사, 건축 전문가 등에게 재능기부를 요청해서 실질적인 설계 및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조금이나마 일이 진행되자 이사들의 반응도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충청권 교회들에서 긍정적인 분위기가 살아난다고 했다. “서울 큰 교회 장로가 건축위원장으로 오더니 뭐가 돼도 될 모양이다”라는 이야기가 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건축위원회는 얼마 후, 충청권 여러 노회 여전도회연합회 회장 및 임원들을 학교로 초청해서 설명회와 기도회를 진행했다. 장소는 열악했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만 몇 대 돌아가는 강의실이라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특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소개를 받고 앞에 나서자 술렁이는 반응이 있었다. ‘서울의 큰 교회 장로’라는 후광에다 충청권에서 익숙한 얼굴이 아니라는 이점이 작용해서인지 설명을 할 때 집중도가 좋았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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