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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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선교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다

목포교회 설립과 배유지 선교사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 지방과 광주 지방에 각각 선교부를 신설하고 두 선교부를 중심으로 해서 전라남도 서남 지방과 내륙 지방에서 성공적인 복음 전파를 한 선교사일 뿐만 아니라, 그도 전라남도 선교를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지금도 광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광주광역시 양림동 동산 언덕 높은 정상에 다른 선교사들의 묘비와 함께 빛고을 광주를 더 빛나게 해 주고 있다. 

배유지 선교사의 원래 이름은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이하 배유지로 표기 1868~1925)이다.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어서 마치 시골 아저씨 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목포에서 성공리에 사역에 임하고 있을 때는 무안 배씨라는 말을 즐겨 쓰기도 했다. 무안 배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는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라는 동리가 있는데 여기를 ‘맑으네’라고 부르고 무안 배씨를 맑으네 배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배유지 선교사가 목포와 인연을 맺기는 1895년 4월 9일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파송을 받은 해는 이보다 2년 앞선 1893년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선교를 지원하는 선교사 모집에 그의 부인 로티와 의논해 한국에 가서 생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내슈빌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를 찾은 것이다.

이에 합격한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했지만 그때 국내 정세는 매우 어수선했다. 우선 1895년 청일 전쟁이 끝나자 전국적으로 전염병 콜레라가 극성을 부리면서 하루에도 50명에서 100명의 무고한 시민이 생명을 잃었다. 이 일로 고종 황제는 1895년 7월 18일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창경궁으로 초청해 전염병 콜레라퇴치운동에 적극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선교사님들, 서울에서만도 2천500여 명이나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 보고에 놀란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진료소를 통해서 전염병 콜레라 퇴치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일에 배유지 선교사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도 최대한 퇴치비를 늘렸으나 33%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접한 배유지 선교사는 남장로교 선교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으며, 자신이 직접 콜레라 환자 수용소를 방문해서 환자들을 간호했다. 소식을 접한 고종 황제는 배유지 선교사에게 콜레라퇴치운동에 앞장을 섰다 해 감사패와 선물을 주기도 했다.

배유지 선교사는 조사들을 대동하고 1895년 9월 28일 선교여행 차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금강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면서 설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같이 동행했던 최의덕 선교사나 전위렴 선교사는 혹시 콜레라에 전염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결국 배유지 선교사는 조사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취소하고 상경해 서울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뜻하지 않은 큰 사건이 일어났다. 1895년 10월 7일 밤에 일본인 야쿠자가 미우라 공사의 지휘를 받고 명성 황후가 거처하고 있는 궁실에 침입해 명성 황후를 체포해 그를 흔적도 알아볼 수 없도록 궁궐 내에서 소각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고종 황제는 밤만 되면 불안에 떨었고, 고종 황제를 지켜보고 있던 선교사들도 나라가 안정되어야 선교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조를 짜서 두 사람의 선교사들이 고종 황제의 침실을 지키기도 했다. 이때 배유지 선교사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황제 침실을 지키면서 하루속히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끊이지 않고 했다. 다행히 고종 황제의 신변 안전을 정부가 보장하자 선교사들은 즉시 철수했다.

이때 배유지 선교사는 고관들로부터 목포가 곧 개항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가 개항되면 전남 지방이 선교 기지가 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국제항이 될 것을 예견하고 이 곳에 기지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개항한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일본인들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평지를 모두 구입했기 때문에 배유지 선교사는 좋은 땅을 구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유지 선교사와 그와 함께 왔던 이눌서 선교사는 할 수 없이 유달산을 바라보는 공동묘지 땅을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신변에 이상이 없음을 안 고종 황제가 러시아인들의 꾐에 빠져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목포 개항이 늦어졌다. 이에 배유지 선교사는 곧장 전남 지방의 내륙 도시인 나주를 택하고, 나주에서 선교 기지 땅을 매입하게 되었다. 나주에 선교 기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나주는 전남 지방의 향교의 본산지였기에 나주에 사는 유생들이 나주 선교를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했던 것은 나주는 전라도의 목사가 거주한 지역으로 전라도에서는 전주 다음의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이다. 전라도라는 말은 전주와 나주의 합성어로서 생겨난 말이다.

한편 나주는 평야가 넓어서 양식에 굶주림 없이 잘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있었으나 나주의 향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한 지역에 서양의 종교가 들어온다는 것은 나주인들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나주가 교통의 중심지도 되고 모든 문화의 중심지, 농산물의 집산지가 되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에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려 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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