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주요 결의 및 활동
김석창 목사의 신앙 열정과 해방 후 사역
남만노회에서 본 총회 총대는 20당회에 총대 2인 선정하자는 헌의는 작년 총회에서 “유안건으로 한 대로 15당회에 총대 2인씩 선정하는 것이 가한 줄로 아오며” 기타 여러 사항을 결의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6회 총회가 1927년 9월 9~15일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모였다. 참석 총대는 목사 89명, 장로 89명, 선교사 34명이었다. 개회예배는 총회장 김석창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 11:33~12:8)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임원을 선거하니 총회장에 김영훈 목사, 부회장에 염봉남 목사가 선출되었다. 주요 사항으로 내빈으로 정진수(북감리회 연회), 쁘래늘 박사(미국 장로회), 로스 목사(중국 선교사)가 참석했다. 고 원두우 목사 기념비를 제막하기로 하고,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회(회장 마펫)를 조직했고, 남경에 유학생 해산으로 선교를 중지하기로 보고받았다.
금강산 수양관 건립을 당국으로부터 인허받았고, 기부금 모금 활동까지 인가를 받았음을 보고받았다. 이에 한석진 목사에게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한석진 목사는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모금했다. 또한 하기 아동성경학교 교사 강습회를 각 노회에서 개최하도록 했고, 전국 여전도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45권, 동교 전 교수(同校 前 敎授) 데이비스 부인이 100권, 아살 박사가 420권의 서적을 평양신학교에 기증했음을 보고받았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목사 철도 이용 할인권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음을 보고받았다.
김석창 목사는 총회뿐 아니라 평북노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는 등 교무에 몸 바쳐 열심히 사역하던 중에 8·15 광복을 맞았다.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정상적인 목회를 할 수 없었으나 해방되자 선천 남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46년에는 성역 40주년 기념 표창도 받았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크나큰 하나님의 축복이요, 한국교회에 더욱 큰 은혜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더욱 신앙의 열정을 다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각오로 온 교우들과 함께 전도에 힘쓰고 서로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광복 후 그는 선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어떤 연고로 인민위원회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그 위원회가 무슨 위원회였는지도 알 수 없다.
1946년에는 곽산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에 괴한들에게 피습당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이 괴한들이 어떤 쪽이었는가? 공산주의자들이었는가, 민주주의자들이었는가? 여하튼 그는 오래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회유되지 않을 것을 알고 술 먹은 군관을 시켜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짓밟기도 했다. 김석창 목사를 모욕하고 상하게 해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북조선 노동당의 횡포로 북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1947년 진갑 잔치 석상에서 가족들에게 모두 월남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위해 교인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목자로서 끝까지 돌보아야 할 임무가 있으므로 월남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했다.
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가족들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안내자에 의해서 월남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