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숭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동기가 있었다. 앞으로 훌륭한 목사가 되어 시각장애인선교 사역을 하자면 실력을 쌓는 지름길을 알아야만 했다.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 목사님들의 조언을 듣고 철학과 진학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철학 한다’ 하는 말은 ‘지식이나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학문을 통해 진리를 함양한다는 헬라적 사고를 뜻한다. 무릇 학문적 지성을 함양시키지 않고서 어떻게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철학적 훈련을 통해 인류가 파헤쳐 온 사상사를 터득하는 기초 학문 없이는 신에 관한 학문인 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방대하고도 어려운 철학과에 도전한 것이다.
숭실대학교는 기독교학교이기는 했으나 철학과는 좁은 의미의 기독교철학에 얽매인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철학적 학문의 기초 과목들을 성실히 공부했다. 때로는 현학적 사고 훈련이 어렵긴 했으나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사고력과 판단력 그리고 분석력에 이르기까지 사상 훈련을 성실히 해나갔다.
인류가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철학 사상들을 하나 둘 접할 때마다 그 시대 환경에 따라 형성되는 철학 사조의 흐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 자신이 세워 나아가야 할 철학적 사고와 사상적 근거를 분명히 하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마하고 있는 사상 훈련은 장차 나와 같이 불행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보조 학문으로서 쓰일 거라는 목적이 분명했다. 철학의 방법론적 입장과 범위를 분명히 해야 앞으로 신학을 통해 쌓아 올릴 수 있는 행동 철학이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학을 하기 위한 기초 학문으로서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이나 심리학 등과 같은 인접 학문도 열심히 수강함으로써 넓고도 깊이 있는 보편성과 종합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나의 학문적 태도는 신학대학에 진학했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만약 내가 기초 학문을 등한히 했더라면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 석사 과정 및 박사 과정을 밟아 나갈 때 엄청난 시련과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대학에서 목회학을 연구할 무렵 이론과 실천이란 학문적 방법론과 실재적 실천론이 하나로 종합되어야 한다는 목회 원리를 습득할 때 대학 시절에 연마한 철학적 방법론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학문을 위해서는 영어를 비롯해 외국어를 어느 정도 마스터해야 하고 영어권에서 계속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 회화에 지장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영어 회화에도 열심을 기울였다.
숭실이란 학문의 전당에서 보낸 4년 간의 생활은 꿈 많은 20대 성인인 나에게는 턱없이 모자라는 시간이었다. 나는 하루를 24시간에서 48시간으로 쪼개어 연구하지 않으면 도저히 학점을 따는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아 백방으로 뛰면서 달려나갔다.
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문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성싶었다. 오히려 신앙 훈련과 헌신적인 봉사 활동 역시 필요 불가결한 과목이요 영성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철저한 영적인 훈련 과정 없이는 성직자의 길은 하나의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고 자칫하면 하나의 직업으로 전락될 수 있기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만 했다.
내 삶의 모델, 도산 안창호 선생
나는 숭실대학에서 영성 훈련에 참여하며, 기독교적 품성을 함양시켜 나아갈 수 있는 건덕을 위한 성품 개발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철저한 자기 반성을 하면서도 기도와 명상을 통해 하나님의 침묵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봉사생활을 실천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시켜 나아가는 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준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나는 철저하게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살아갔던 안창호 선생의 깊은 영성을 실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나는 주일이면 해방교회에 나가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그 당시 해방교회는 용산중학교 입구에서 내려 미 8군 뒷문을 통과하고, 수도여고 앞과 후암동 종점을 지나서야 갈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교회까지는 걸어서 40여 분을 더 가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가는 길에는 장애물도 많았지만 다행히 교회에 가는 학생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장애물들을 잘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던 터라 주일예배를 드린 후 오후 시간에 있을 청년회 집회에 참석하려면 값싼 삼립빵 하나 정도 나누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교회에 봉사한다고 해도 교회의 재정은 교사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 사 주기도 힘겨운 형편이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