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기고] 정도신앙(正道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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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이념 대립의 역사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되고 1917년 러시아 혁명, 1936년의 스페인 내란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구체화된 한국의 좌우 대립은 진행형이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과 공화당도 이념갈등이 있지만 우리네처럼 첨예화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네 경우 종교마저 이념갈등에 휘둘리고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2025년 새해를 맞으며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다. 그것은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라는 구절이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으로 우와 좌는 지리적 의미가 아니다.
당시 점령해야 할 가나안 주변은 온통 적대부족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예를 들면 블레셋, 히위, 헷, 아모리, 브리스, 여부스, 모압, 압몬, 에돔, 미디안 등 단 하나도 우군은 없었다. 북쪽엔 레바논 산맥이 남쪽엔 시내반도가 서쪽엔 지중해가 그리고 바알, 아세라 등 우상종교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맹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남북 길이 막혀 있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에 에워싸여 있다.
레바논,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란, 이라크, 사우디 등 알라를 믿는 회교국들이 포위망을 치고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출구는 동서남북도 우도 좌도 아닌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 정도신앙이라야 했다.
여호수아에게 분부된 정도신앙은 율법을 지켜 행하고 우와 좌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취할 신앙자세는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다. 우와 좌는 방향성이라야지 목적이 되면 안된다.
정도란 앞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지 좌나 우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다. 잘 믿는 것과 바르게 믿는 것, 잘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천문학적 부를 누리는 사람은 잘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잘입고 먹고 여유를 즐기며 사는 사람도 바르게 사 는 사람은 아니다. 바르게 벌고 쓰고 나누고 청지기적 삶을 사는 사람이 바르게 사는 사람 이다. 일본 부자들은 나누고 베푸는데익숙하지 않다. 한국 부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 부자들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론 머스크는 57억 달러를, 빌 게이츠는 700억 달러를, 워렌 버핏은 총자산의 99프로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야말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바르게 벌고 바르게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신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잘믿는 것과 바르게 믿는 것은 같지 않다.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았노라는 사람들,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출석 잘하고 성경통독에 필사도 앞장서는 사람들, 수많은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들 모두 본받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외적 행위만으로 바르 게 믿는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베들레헴 예수탄생 기념교회는 입구가 좁다. 주후 4세기 건축할 때 입구 문을 넓고 크게 만들었는데 귀족들이 말 탄 채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6세기에 작은 문으로 고쳐 만들었다.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하고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어서 겸손의 문이라고도 부른다. 정도신앙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믿음과 삶의 일치, 다시 말하면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입으로만 잘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외식하는 사람들이라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최재천 교수는 「숙론」이라는 책안에서 “평생 참으로 다양한 동물을 관찰해 왔지만 이념이 다르다고 싸우는 동물은 본 적이 없다. 종교가 다르다고 전쟁을 하는 동물도 본 적이 없다. 물론 몇몇 동물에게서 왼발잡이와 오른발잡이가 따로 있는 건 발견한 바 있지만 그들이 좌, 우 혹은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한 적 또한 없다”라면서 왜 인간만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계층 갈등, 남녀 갈등, 세대 갈등, 환경 갈등, 문화 갈등으로 각을 세우는가 손 잡아야 살아 남는다는 명언을 적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우와 좌로 편 가르고 휘둘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연지사인양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중세 교회의 질주를 막아선 사람이 마르틴 루터이다. 종교개혁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교회개혁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 당시 루터의 개혁 대상은 종교가 아니라 타락한 기독교였기 때문이고 그의 개혁은 당시로 끝난 게 아니고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리고 개혁 대상은 「너」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의 축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말씀 안에는 우도 좌도 없다. 우리가 걸어야 할 정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2025년 새해! 정도 걷기 운동이 동서남북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정장식 교수는 자신의 책 「펜타곤 법칙」 안에서 “정치가 멋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리 적이지만 때로는 적의 좋은 정책을 칭찬해 주는 여유와 자기의 소신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의원직까지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멋있는 정치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나라의 장래가 이처럼 어려워지고 있는 이때, 정말 거국 내각이라도 구성한다는 각오로 여야가 진정 통 큰 정치를 해야만 앞으로 닥쳐올 난국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긴 글을 연하장에 굵게 새겨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면 좋겠다.
그들뿐인가. 정치 지향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 용이하진 않기 때문에 각고의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자」가 2025년의 키워드가 되고 한국교회의 공유가치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
정도 신앙, 정도 신학, 정도 정치, 정도 경제, 정도 교육, 정도 문화 그리고 정도 인생이 정착하는 2025년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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