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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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신학교 숙원 사업… ‘합력해서 선을 이룬’ 일

학교 건물 건축계획과 건축이 꼭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난 뒤 여전도회연합회장에게 마이크를 주었다. 그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는데 상기된 표정이었다.

“저희는 그동안 연합회 사업이라고 하면 돈을 모아서 전국여전도회중앙회에만 갖다 주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대전신학대학교가 우리 교단의 학교인지도 몰랐어요. 이 학교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몰랐고요. 앞으로 저희 충청권 여전도회연합회가 열심히 돕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충청권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목회자들, 노회 장로회연합회, 남‧여 선교회연합회 등을 학교로 초청해 여러 차례 기도회를 열었다. 이런 기도회를 모이도록 연락하고 준비하는 일을 충북노회 문의교회 김용헌 장로가 솔선해서 수고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동안의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는 동안 견고해진 ‘안된다’,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다. 시작을 해야 엄두라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작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스카프 공장을 하던 형님께 부탁해서 실크 스카프를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했다. 이를 잔뜩 안고 가서 기도회 때마다 나눠 주었다. 모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 작은 선물은 분위기를 밝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냈다.

건축계획과 진행된 설계 등 설명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긍정적인 기대감으로 바뀌어 갔다. 이후로도 기도회를 할 때마다 구내식당에서 국밥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고 작은 선물을 주는 등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다. 내가 먼저 ‘건축헌금 1억 원’을 작정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충청권에 전혀 연고가 없는 타 지역 장로가 선뜻 헌금을 작정했다는 소문이 충청권 지역 교회에 자극제가 된 모양이었다. 밤낮없이 교회, 노회, 동창회 할 것 없이 전국 교회를 발이 닳도록 누비고 다니는 문 총장, 그리고 건축위원들의 열정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에 감동한 충청권 교회들의 헌금이 모여들었다. 전국 대형 교회들의 헌금도 이어졌다. 건축 가능성이 눈에 보이자 모금 금액도 커지고 참여교회도 점점 늘어갔다.

드디어 건축이 시작됐다. 재정이 넉넉하고 든든한 대전 향토 기업인 계룡건설이 건축을 맡아 자금 독촉 없이 건물을 완공해줬다. 건축비 잔금은 학교가 사학연금재단으로부터 저금리로 대출을 받아 깨끗하게 완불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합력해서 선을 이룬’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전신학대학교는 2004년 3월 16일, 개교 50주년 예배를 연건평 9천9m2로 완공된 새 본관에서 드릴 수 있었다. 이후 문 총장은 건축을 완공하고 대학 인가신청을 한 후에 서울장신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9년 민경설 총장 재임 때 교과부로부터 드디어 4년제 정규대학 인가가 나왔다. 50년 숙원 사업이 이뤄진 것이다. 이 귀한 일에 작게나마 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쁘다.

묵묵히 함께하는 자리의 보람

맡았던 역할은 작았지만 그 의미와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던 일이 또 하나 있다. 아시아 유일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의 기초를 놓은 일이다.

2010년 12월 1일 개소한 소망교도소는 2014년 말 기준으로 350명의 수용자가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그때까지 총 371명이 출소했는데,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되는 재입소율이 5.1%(19명) 정도다. 국내 다른 교도소 재입소율(20~22%)에 비하면 현격이 낮은 수준이다. 소망교도소는 1999년 12월 ‘민영교도소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된 시점부터 그 필요성과 설립 준비 과정이 일반에 알려졌지만, 처음 준비가 시작된 것은 그보다 4년 앞선 1995년부터였다. 

내가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서울 한남지회장을 맡고 있던 1995년 10월,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님을 강사로 모셨는데 강의가 끝나고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다.

“브라질에 ‘휴마이타 교도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교회가 정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민영교도소인데 신앙과 사랑으로 재소자들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위탁할 당시 75%였던 재범률이 4%대로 낮아졌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생소했지만 ‘신앙으로 재소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니 참 좋은 일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 교도소를 만들려고 합니다. 추진위원회를 먼저 설립할 것인데, 박 장로님께서 이사로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저런 교단 일과 교회연합 사업들에 숱하게 참여해봤지만 이처럼 낯설고 나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법조계 인사나 교정전문가들이 참여하셔야지요.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박 장로님께서 재정 담당 이사를 맡아 주세요.”

평소 존경해오던 이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부탁하시기에 일단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추진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성사된다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10월 기독교 민영교도소 설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됐다. 이 목사님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교계 어딘가에 소속될 필요가 있었기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산하로 들어갔지만 운영이나 활동은 독립적으로 이뤄졌다.

법률적인 부분에서 힘을 쓴 사람은 이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승규 당시 대검찰청 감찰부장이었다. 또한 그때만 해도 젊은 검사였던 황교안(이후 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냄) 검사와 여러 젊은 검사들이 힘을 보탰다.

얼마 후 미국 LA 사랑의교회에 있던 오정현 목사가 이 소식을 듣고 10만 달러를 보내왔다. IMF 구제금융 영향 때문에 한화로 환전하니 1억 4천만 원 정도 됐다. 이 돈으로 초기의 기본적인 운영을 했다. 그 밖에는 재정을 보태는 기관이나 사람이 한동안 전무했다. 그러나 이사회, 이런저런 회의, 세미나, 강연 때마다 장소 사용비, 식사비, 강사비 등이 들었는데 그 비용은 모두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재정 담당’ 이사였던 것이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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