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관찰자의 삶을 살았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과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어릴 적 그런 모습은 대학에 입학하고 목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외톨이처럼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이 더 편했다. 공부도 주류의 신학보다는 비주류의 신학이 재미있었고 그런 기질이 오늘 나를 나섬의 목회자로 살게 한 것 같다. 아웃사이더가 역사를 만들지는 않는다. 역사를 읽지만 스스로 역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라 하듯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은 역사의 승자가 되는 것을 포기한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가 승자의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읽고 논할 뿐 내가 역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요즘 들어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면 모두가 역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권력을 잡고 그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역사의 단면을 보며 역사의 마지막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권력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주류의 한복판에 살고 싶은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정치와 교회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교회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허하고 치열하다. 모든 교회 권력의 중심에 서고 싶은 이들이 교회 정치를 하며 주류로 입성하려 한다.
누가 권력자가 되는가에 따라 한쪽 편은 이기고 나머지는 몰락한다.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고 승자는 역사라 부르고 진자는 패족이라 말한다. 나는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으니 승자도 패자도 아닌 제삼자로 남아 구경꾼으로 존재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왜 주류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아웃사이더는 열등감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열등감 없는 변방성’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열등감 없는 변방의 비주류로 남고 싶다. 그래서 어떤 주류의 입장에도 서고 싶지 않다. 다만 비주류로 남아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며 책을 읽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언젠가 바다로 갈 날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평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비교되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하고 싶었고 그것이 나섬이며 내 삶이다. 나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존재하고 싶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완전한 외톨이로 존재하고 싶다.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라 했고 나는 그의 말을 좋아했는데 내 바람대로 된 것 같다. 나를 비교하지 마라. 나를 평가하고 승자이니 패자니 하는 말로 내 삶을 주류와 섞지 말라. 오직 나는 비주류 아웃사이더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고 싶은 삶이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