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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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선교 시도의 좌절과 목포 선교의 시작

1896년 12월, 선교협의회에서는 배유지 선교사와 전위렴 선교사를 답사차 나주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인천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는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나주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나주까지 오는 도중 목포에 들렀던 이들 일행은 1897년 3월 2일 목포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목포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날 예배는 배유지 선교사의 어학선생이며 조사였던 변창연이 맡았다. 이들은 얼마 동안 목포에 머물면서 자신들이 매입한 땅을 보았으며, 더 좋은 땅이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를 답사하기도 했다.

다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포까지 올라간 후 드디어 3월 12일경에 나주에 도착했다. 배유지 선교사 일행은 우선 선교의 거점으로 나주 시내에 위치한 초가집 한 채를 매입해서 동행했던 변창연 조사로 하여금 살게 하고, 이 집 일부를 수리해 배유지 선교사의 거실과 침실로 꾸미고 다른 방 한 칸은 책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나주에서 쫓겨난 선교사들

그런데 어느 날 유생들이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한국인 변창연 조사가 미국인과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외국인은 개항된 도시에만 살게끔 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나주만은 개항된 도시가 아니었기에 선교사들이 나주에 거주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생들은 매일같이 초가집을 판 사람에게 방문해 항의하자 집을 팔았던 사람은 나주에 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런 법을 알고 팔았습니까?”

“아니, 나주 고을에 살면서 그런 법도 몰랐단 말이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집을 물러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집을 판 주인은 곧장 변창연 조사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선교사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팔았던 집을 물러주지 않으면 저의 신분에 위협을 가하겠다고 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외국인들도 어느 도시고 구별없이 살 수 있는 날이 곧 옵니다. 우리도 지금 나주 외곽에 넓은 대지를 사서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잘 모르니까, 제게 말하지 말고 하루속히 제 집을 돌려주십시오. 그리고 여기 제가 받은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러한 대화가 얼마 동안 오고 가다가 집주인은 집 판 돈을 전부 놓고 가 버렸다. 마치 때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젊은 유생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배유지 선교사 앞으로 다가섰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당신네들의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협박을 한 청년들이 썰물처럼 싹 물러나고 적막한 찬 공기만 배유지 선교사 거실에 가득 메워졌다. 이때 배유지 선교사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이야기가 기억에 스쳤다. 마포삼열 선교사도 처음에는 강력한 반발이 있었지만 끝까지 참고 기도했던 결과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는데 나는 왜 그럴 만한 용기가 없을까?

몇 번이고 자문자답하며 그는 멍하게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유생들로부터 받은 그 모멸감이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것을 소화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어 다시 거실로 돌아온 배유지 선교사는 변창연 조사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의견을 서로 교환했다. 평양에서의 선교사들의 반대와 나주에서의 선교사에 대한 반대 강도는 너무나 달랐으나 변창연 조사는 서울 태생으로 유생들의 그 철저한 저항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옛날부터 나주는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었기에 이 벽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을 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한편 변창연 조사와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성을 빠져 나오면서 언젠가는 다시 오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영산포로 향해 그곳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이미 목포에 선교 기지를 마련하고, 또한 만복동에서 교회를 시작한 목포였기에 어딘가 모르게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목포도 1897년 10월에 개항된다는 소식과 함께 사람들이 활기를 띠면서 목포로 몰려들고 있었다. 또한 일본 사람들도 무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유지 선교사는 개항하게 되면 의료 선교사가 오는 대로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목포를 떠났다.

한편 변창연 조사는 자신이 설립한 교회에 정성을 쏟았는데 목포교회는 변창연 조사가 설립했다고 쓰여 있는 「목포 부사(史)」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선교사가 목포에 들어와 선교운동을 개시하기는 꽤 오랜 시기에 속한다. 현 무안군 이로면에는 천주교가 창립되어 1897년 봄에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가을에는 개항이 되었는데 약 반 년 앞선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배유지는 조선인 변창연을 파견해 서울에서 목포에 오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선교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목포 부사」에 의거해서 목포교회는 1897년 3월 2일을 창립일로 정하고 그후 매년 교회 창립 행사 주일을 지켰으며, 그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100년을 지켜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해서 1997년 3월 2일 목포 양동제일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 처음 기초를 쌓았던 변창연 조사는 목포교회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며, 또한 직접 목포 선교를 진두 지휘했던 배유지 선교사의 공을 잊을 수 없다. 일단 나주선교부 신설에 실패한 배유지 선교사는 곧 목포로 자리를 옮기고 개항과 함께 목포선교부 개설에 정열을 쏟았다. 배유지 선교사가 처음으로 목포 여행을 떠나면서 서울에서 어머니께 보낸 서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눌서 목사와 저는 내일 3주간에 걸쳐서 시골로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이것을 봐서 어머님께서도 제가 홍역으로 인한 병약함을 완전히 극복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목포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남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읍인데 저희들은 그곳에 약간의 땅을 사서 선교부 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그곳은 아마 멀지 않아 도약 항구로서 개방될 것이고, 은행이나 우체국 등도 들어설 것입니다.” (배유지. 1896년 2월 9일 주일, 한국 서울에서)

배유지 선교사는 1894년 4월 18일 선교여행시에 목포를 방문한 일이 있던 이눌서 선교사를 대동하고 갔으며, 이때 이눌서 선교사는 목포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배 선교사님, 저는 선교여행 답사차 유대모 선교사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1894년 3월 30일 군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전주로 해서 김제, 흥덕, 고창, 영광, 함평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무안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낮 식사대를 바가지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포로 진입을 했습니다. 목포시장에서 전도 강연을 하는데 왠 청년이 손을 번쩍 들고 남대문시장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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