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생을 살아가노라면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될 때와 자기는 별 관심이 없는데 그 일을 해야할 두 가지 경우를 가진다. 이를테면 하나의 운명론적인 관계인 것이다.
사실 처음에 나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신앙인으로서 기업가로서 그저 묵묵히 나의 일을 하고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산다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 터였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나와 다른 인생과 목표를 가진 많은 분들과의 교우를 갖게 되고, 나름대로 인연을 맺다보니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좋아하는 분들과 혹은 뜻과 이상을 함께하는 여러분들의 권유와 추천으로, 조금씩 나도 모르게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사회의 여러 민의에 관한 유관단체와의 인연, 그리고 종교 활동과 기업가로서의 꼭 필요한 사회 참여 등이 연관되어 시류와 조류에 따라 생겨나는 여러 단체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추대나 추앙, 혹은 위촉, 임명을 함으로써 그 단체에 흡수되는 과정이 나의 정치 입문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 보니 1982년 8월 16일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3동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장을 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소신과 이유로 목표를 가진 분들과 접촉하게 된 계기가 정치 입문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단체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나다보니 사회의 각계 지도층과의 우의와 신뢰, 그리고 믿음의 바탕에서 자연히 숙성된 가치관들이 집약되는 곳이 정치이구나 하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기초단체의 선거관리위원이나 ‘사회정화위원’, 그리고 ‘평화통일자문위원’, 혹은 ‘한국반공연맹’, ‘바르게살기운동’ 등에 관계한 것들의 이력이나 약력들이 종국에는 정치와 연계되고 보니, 나 자신의 폭넓은 대인관계와 신앙성, 그리고 민의에 접근할 수 있는 참신성으로 대변되어 점점 정치하는 분들의 이해와 관심을 끌게 된 것 같다.
1991년 ‘부산남구의회’ 의원에 당선될 때부터 많은 이웃 주민과 교우들, 그리고 평소에 친분이 있는 정계와 관계에 있는 분들이 직 접 찾아오거나 어떤 모임같은 데서 간곡한 권유로 나의 근면성과 참신성, 그리고 인간애적인 여러 면모를 강조하며 더욱 큰 꿈에의 도전을 구하는 게 아닌가. 그 첫번째가 구의회 의장이요 다음은 국회의원에 도전하라며 내게 대한 과분한 찬사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일면 감사하기도 하고, 또한 내가 내 이름 석자를 결코 더럽히지 않았구나 하는 자신감은 더해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평소의 나의 인품과 덕성을 들먹이며 지역주민들을 위해서라도 봉사하는 마음에서라도 간곡히 출마하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기초단체의회인 남구의회 의원에 출마를 굳히게 되었다.
이후 나는 금품을 살포하거나 향응을 제공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으로 구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분들의 진심어린 충정과 출마 권유, 그리고 정치에서 많은 불신을 가진 분들이 어쩌면 처음의 정치 초년생이요 정치에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나의 참신성을 인정해 나를 당선시킴으로써 대리 만족을 얻는 일념처럼 보였다.
많은 분들의 축하와 기꺼이 무료봉사로 자원봉사한 분들이 자기 일들같이 좋아하는 가운데 자고 일어나 보니 집에 있는 난 화분의 하나가 꽃대궁 속에 꽃잎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초록의 청순한 잎맥에 틔운 그 꽃망울이 그렇게도 신비스럽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온 거실을 환하게 장식하고 있는 듯 하나의 선연한 기품으로 고귀하게 꽃피운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나는 내 서재에 옮겨 놓고는 하나의 길조라고 생각하며 종일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정치의 초년생이고 지방의 기초의원이라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나는 여기서 하나의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일생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현안들과 고비가 또 다른 자기 창출의 원인이 되겠지만 나는 이를 계기로 좀더 많은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하며 그 분들을 위해 더욱 낮은 자세로 섬기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불쌍한 이웃과 고난과 역경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욱 사랑과 봉사의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정신은 맑아 왔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부산광역시 남구의회 의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나 뜻을 두지 않았었는데, 주변에서 혹은 의원 당선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나를 의장으로 추천 옹립하겠다는 뜻을 전해 오는 게 아닌가.
의장으로서의 자세가 확고히 되고 나는 여러 의원들의 환영과 축하 속에 지방자치단체 제1기인 1991년 4월 20일에 부산직할시 남구의회 초대 의장에 취임하는 영광을 안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의장에 입후보해서 의회 의장이 되기까지 조금도 고민하거나 어려움 없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이 사실이 나의 과거와 현재를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고 미래에 대한 삶의 크나큰 교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도 결코 홀로 설 수는 없다. 자기 관리를 보다 철저히 하고 낮추어 사는 겸손의 미덕으로 차별 없이 대하는 그 진심의 마음이 결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 사람들과의 마음이 진정 소통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목적의식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잠언적 의미를 이때 나는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기초단체의 민선 초대 남구의회 의장에 당선되면서 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남구의회 회보를 발간한 일이다. 지역주민과 남구의 관계 유관단체가 남구의회의 하고 있는 일들과 진행과정과 목표 등을 소상히 앎으로써 자긍심과 비판도 함께 가지며 업적도 기릴 수 있는 민관이 함께하는 공동체의 의식을 갖게함이 그 목표였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