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석창  목사 ⑥

Google+ LinkedIn Katalk +

순교자 김석창 목사, 신앙과 애국의 상징

헌신으로 이룬 한국교회 믿음의 발자취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북한 땅을 지키던 그는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하자 유엔군 환영 행사를 주도했다가 유엔군이 철수한 후 선천군이 다시 조선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1950년 12월 20일경 총살당 했다.

김석창 목사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목자였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말씀대로 김석창 목사는 순교를 각오한 성실하고도 진실한 참 목자였다.

목사요, 독립운동가였던 김석창 목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교회가 있다. 1983년 5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인도로 헌당되었던 지금의 충성교회는 정세준 목사가 부임한 후 군선교 기관의 후원으로 보수 공사를 했다. 교회의 지붕 보수와 예배당 전면 개축과 주방, 교육관, 화장실 등의 수리를 끝내고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감사예배에서 구충서 목사는 ‘거룩한 부담은 축복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으며, 이학수 목사가 축도했다.

군인 교회로 시작한 것은 김석창 목사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끝까지 싸우다가 순교한 분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데 대한 새로운 사명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군인들이 많으며, 민간인이라도 싸우는 신앙으로 마귀의 세력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통일한다는 애국심으로 십자가 군병으로 임하고 있다.

김석창 목사는 성자의 칭호를 받을 만큼 덕망 높은 목사였다. 일제하 어려웠던 동토의 식민지 시절에 이어 1919년 3·1 민족 독립운동과 6·25 전쟁을 겪는 와중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이끌어 왔고 한국기독교 선교 100년사에 아름답게 한 송이의 백합화가 되어 한국교회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한 훌륭한 교회 지도자로 대를 이어 향기를 발하고 있다. 김석창 목사 같은 순교적인 희생과 헌신, 모범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 활동을 기억하고 건국공로 훈장을 추서했다.

순교자 김석창 목사의 신앙은 그 자손에게로 이어지며 빛나고 있다. 김석창 목사의 아들 김희철 장로는 가난한 목회자의 삶에서 희생양이었다. 아버지 김석창 목사는 명철하고 은사가 돋보인 넷째 아들 김희철이 목사가 되기를 바랐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장로가 되었다. 목회자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보아온 김희철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으나 목회자의 길은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평생의 짐이 된 김희철 장로는 평생 목사님을 열심히 섬기는 신앙인으로 살았고, 맏아들 김광식 장로가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 김희철 장로가 할아버지 김석창 목사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목사가 되지 않은 것처럼 김광식 장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연세대학교 신학과까지 진학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며 점점 목회에 대한 부담감을 얻는 대신 자신감을 잃었다. 그리고 우연히 도미 기회를 얻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목회자의 길을 접었다. 이민자의 삶으로 정착하고 살아오면서 여유 없는 삶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을 접은 것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