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사무엘 무어(모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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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 부흥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결단을 주어 선교의 세대 위대한 19세기를 낳았다. 무어도 무디 부흥운동에 감동을 받고 선교사로 결단을 했다. 무어(Samuel F. Moore.)는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승동교회)와 동막교회 대현교회 등을 개척 설립했다. 미국 장로교 총회(PCUSA)는 무어의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 동막교회를 무어 공식 기념교회로 지정했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노예 해방을 이룬 분이라면 무어는 한국의 백정 해방을 이룬 선교사이다. 백정은 당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천민 중 천민이었다. 갓을 쓰거나 평민들처럼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나환자들이 입에 손을 대고 “나는 부정하다”고 외치며 다녔던 것처럼 당시 백정은 허리와 다리를 구부리고 껑충껑충 뛰면서 걸어 “나는 백정이다”를 알렸다.

백정 박씨는 자신의 아들 만큼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들 봉출을 무어 남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기독교엔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다. 1894년 어느 날 박씨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때 무어는 제중원 원장이자 고종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의 도움으로 박씨를 치료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박씨는 곤당골교회에 출석을 하고 박성춘이란 이름까지 얻었다. 

박성춘은 무어로부터 세례를 받고 많은 동료 백정들을 전도했다. 이에 곤당골교회 양반들은 무어 선교에게 항의를 했다. “양반이 백정과 같은 자리에 앉아 예배할 수는 없다. 좌석을 따로 만들어 달라!” 그들은 교회를 떠나 양반들만의 교회를 세우기까지 했다(홍문동교회, 나중에 다시 병합함).

그러나 무어는 양반도 백정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무어와 에비슨의 노력으로 백정도 갓을 쓰고 의관을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평민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백정 해방 운동가 무어는 1906년 7월 「그리스도의 신문」 사장에 취임했으나 그해 12월 장티푸스에 걸려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 양화진에 잠들었다. 

오늘 우리가 백정 해방 운동 외에도 무어 선교사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 왕정 시대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어진 계급사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계급 없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세워준 사실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들과 교회를 정동 안에 가둬두고자 할 때 교회가 대한민국 중심으로 들어가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문안교회와 함께 곤당골(승동)교회를 정동 밖에 세운 일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결단이었으리라! 사무엘 무어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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