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한 삶, 영성 훈련의 필수과목
청빈한 삶 역시 영성 훈련에 없어서는 아니 될 훈련 과정이었으며 덕목의 필수 조건이었다. 버스표 한 장을 줄 수도 없는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영성 훈련은 나에게 귀중한 훈련의 기회였다. 나는 기숙사에서 주는 밥표를 줄이기로 결심했다.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금식기도에 임하는 자세로 하루에 한 끼씩 거르는 장기 부분 금식에 돌입한 것이다. 어떤 때는 두 끼씩 굶는 금식도 했고, 어떤 때는 주님과의 교통을 위해 이삼 일씩 물만 마시고 하는 금식기도를 단행하기도 했다. 주께서 나에게 강인한 체질을 주셨는지 아무런 병이나 탈 없이 금식기도라는 영성 훈련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일은 자기 절제를 위한 훈련인 동시에 욕심을 버리고 허영심을 버리는 데는 필요 불가결한 일이기도 했다. 숭실대학교 기숙사에서 한 달 동안 한 끼씩 금식한 식권을 현찰로 공제 받아 나는 교회 헌금을 비롯해 교통비와 세탁비 등 생활비로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가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다과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교회 봉사 활동을 통한 또 하나의 영성 훈련에서 얻은 기쁨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왕복 교통비마저 줄인다면 나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이 일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교회에서 봉사하는 한편 한 달에 두 번씩 숭실대학교 가까이 있는 동명학원이란 나환자 미감아 수용 고아원을 찾아 나섰다. 그곳은 세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약 100여 명이 수용된 고아원으로 도움이 절실한 곳이어서 나 같은 봉사자가 돕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동화를 들려주고 함께 어린이 찬송도 부르고 뛰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삶은 번데기나 뻥튀기 과자를 사서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들은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면서 가지 말고 자기들과 같이 살자고 응석을 부렸다. 일년 반 동안 나의 친구 이인서 씨와 함께 봉사하면서 청빈의 도리를 실천했다.
등록금을 개척교회 건축헌금으로
후배 이상욱 형제의 소개로 또 한 번 나에게 봉사를 통한 헌신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의 헌신과 봉사는 아마도 대학 4학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영성 훈련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것은 몸으로만 섬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바쳐야만 되는 철저한 봉사여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은 주일학교 지도를 잘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나가는 개척 교회를 도우시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개척 교회를 난생 처음으로 나가 보았다. 도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린이 지도부터 성가대 인도까지 다방면에 걸친 봉사 활동은 나의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몇 주가 지나자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해야 하는데 교회가 주는 예산은 거의 없었다. 나는 김정남 장로님과 한두식 장로님께 말씀드려 상당액수의 현금을 받아 교재와 활동자료 및 간식들을 구해 여름 성경학교를 진행할 수 있었다. 마지막 종합 발표회까지 마친 다음날이었다.
이상욱 형제는 나에게 신광교회가 무허가 건물이어서 구청에서 헐어 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졸업 논문도 써야 했기에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잣집 자녀들처럼 넉넉한 용돈도 없는 매우 가난한 대학생이었으니 도울 길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규정 위반이지만 나는 이근태 사감님의 특별 배려로 기숙사에 있었다. 그 대신 중풍 병자로 누워 있는 이 사감 장로님의 부인을 안마해 드리며 정성껏 도와드렸던 것이다. 이 사감님은 친아들처럼 나를 도와주었고 가끔 급하게 쓸 용돈까지 꾸어 주시곤 했다.
나는 헐어 버린 교회에서 흙벽돌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서 무엇으로 도울 것이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는 나로서는 헌금할 길이 전혀 없었다. 내가 가진 돈이라곤 졸업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뿐이었다. 나는 기숙사비만 내고 등록금을 송두리째 헐려 버린 신광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쳤다. 그리고 함께 벽돌을 쌓아 예배를 드릴 처소를 위해 기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나의 헌신과 봉사라는 영성 훈련의 기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미등록 상태에서 마지막 학기를 공부했는데 서무과와 학생처에서는 매일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사모아 놓은 귀중한 책들을 후배들에게 헐값으로 넘겨 주면서 1만 5천500원이란 등록비를 충당하려고 했지만 겨우 절반 정도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그 당시 고○○ 학생처장은 나를 불러다 놓고 학생이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한다는 것은 도둑놈의 심보라고 나무라면서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퇴학 처분하겠다고 호통을 치셨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