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 이야기] 현대판 보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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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 임금 선조 때의 일이다. 『퇴계언행록』 제5권 「잡기편」을 보면 퇴계 선생의 심중이 잘 드러나 있다. 그분의 맏아들이 스물한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죽음도 몹시 서러웠지만, 그보다 새파란 젊은 맏며느리가 청상과부가 되어 남편도 자식도 없이 어떻게 한평생을 홀로 보낼 것인가가 더 염려스러웠다.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기 집과 친정 집 모두에 누가 될 것이기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러기에 한밤중이면 일어나 집안을 순찰했고 집단속도 철저히 했다. 아무 일이 없기 위해서 였다.  

어느 날 깊은 밤이다. 집안을 둘러보고 있던 퇴계 선생은 깜짝 놀랐다. 며느리 방에 불이 켜져 있지 않는가. 가까이 가 들어보니 누구와 분명히 대화하고 있었다. 누굴까.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순간 얼어붙은 심정이었다. 누굴까.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살며시 며느리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한 잔 잡수세요. 어서 잡수시라니까요.” 하지 않는가. 그때였다.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 앉아 있는 며느리를 보았다. “여보, 어서 잡수시라니까요.” 이렇게 권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는가. 그간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어 외로웠던 심정을 털어 놓고 난 뒤 소리가 날까봐 숨죽여 흐느끼는 며느리였다. 짚으로 만든 그 인형은 바로 자기 아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마터면 순찰하는 자기의 정체가 드러날 뻔했다. 퇴계 선생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저 젊은 며느리를 수절시켜야만 옳은가. 과연 그 길이 바른 것인가. 분명 옳은 일이 아니다. 너무도 가혹한 것이다. 인간을 처절하게 구속시키는 것이 어찌 윤리이고 도덕이겠는가.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자문자답하고는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자기 집에 초청했다. 

사돈인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찾아왔을 때 “며느리가 너무 젊고 참하여 차마 볼 수 없네. 그러니 자네 딸 데려가게.” 그러자 친구인 사돈은 “안 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게 무슨 말인가?” 딱 잡아떼었으나 퇴계 선생의 완강한 권유에 어찌할 수 없어 그는 딸을 데려오고 말았다.

물론 학문으로 터득한 인간 본연의 심리요, 고요한 내면의 세계까지도 꿰뚫고 있는 그의 깊은 마음 때문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친정에 온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보쌈의 과정을 밟아서 재가를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편의 사랑을 극진히 받아온 자가 갑자기 홀로 지내기란 너무도 어려울 것이다. 살을 여미는 아픔이랄까. 아마 그보다 더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육체의 아픔은 약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독으로 한 밤을 지새우는 것을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밤이 어찌 쌓이고 쌓이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도 퇴계 선생과 같은 그런 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입장과 편리만 내세우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깊은 내면의 세계까지 생각해준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높은 정신인가. 남의 인생을 더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며 염려해주는 그런 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 나는 때때로 고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귀한 시간을 보낸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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