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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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로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가 그 심정을 담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편지를 보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도에 진전이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는도다”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다. 끊임없는 전쟁, 자연재해, 인재(人災)가 그치지 않고 있다. 사건, 사고도 날마다 많이 일어난다. 자식들 키우고 손주들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과 세상 현실이 모순되어 보인다. 자신과 자녀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분노와 상심(傷心)으로 교회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오늘날 세상에 주는 기독교의 대답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런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는다. 분명한 답을 주시진 않지만 감사하게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답을 주고 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문제들은 그대로 안고 살아가게 하셨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인물 중에 고난을 겪지 않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우리의 죄와 무가치함 때문이 아닐까? 우리를 힘든 상태에 두시고,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모(仰慕)하며 의지하게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몰라야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생각할수록 은혜라는 생각이다. 언제 재난을 당하고, 언제 병이 들고, 언제 죽는 것을 다 알고 산다면 삶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우리가 한낱 피조물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이처럼 불가해(不可解)한 일들을 허락하신다는 생각이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일들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느냐의 마음이다. 욥은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듯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린다. 쉴 새 없이 불평하면서도 주님께 등을 돌리거나 그 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복음 중심의 태도는 무슨 일을 당하든 하나님을 향해 불평, 불만, 원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일말(一抹)의 의구심(疑懼心)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도가 절대적으로 확신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사도는 감옥에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지?’ 하지 않고 ‘이 일이 복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를 생각했다.

‘정말 힘들고 괴롭다’ 대신에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묵상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대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기를 원했다. 

역경과 시련과 환란이 닥쳤을 때 먼저 하나님께 대해 ‘하나님이 이 시련과 환난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이 모든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과 뜻은 무엇일까?’ “혹독한 시련과 아픔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정근모 박사)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 아들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세월이 지나 되돌아 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아멘 !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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