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대립적 관계… 화합과 타협으로 이끌어
열정•협력으로 이룬 새로운 도전 ‘민영교도소 설립’
교회 회복… 믿음으로 앞장서자 화해의 물꼬 터져
몇 년이 지나도 일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느낌도 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함께 하던 이사들의 관심과 열의가 떨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이사회에 참석했고 꾸준히 재정을 감당했다. 내게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목사님과 김승규 법무부 감찰부장이 어찌나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지 함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설 만큼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마침 김일수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개인 돈 1천만 원을 내놓으며 힘을 보태고 나섰다. 김 교수는 2대 이사장을 맡아서 힘든 고비를 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이 성사되는 방향으로 접어든 결정적 계기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강남 YMCA 강당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였다. 전국에서 목사 천여 명이 모이는 행사인 ‘한국 교회갱신연구원 목회자 산학세미나’ 자리에서 마련된 토론회였는데, 여기서 이종윤 목사님이 김대중, 이회창, 김종필 세 대통령 후보에게 ‘민영 종교교도소 제도’를 설명하고 도입 의사를 질의했다. 그러자 세 후보 모두 “대통령이 되면 꼭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재단법인 아가페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모금이 이뤄졌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3대 이사장을 맡았다. 순복음교회에서 30억 원을 기부하고 광림교회, 소망교회 등도 5억~10억 원씩 기부 약정을 하면서 일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김승규 장로가 법무부 장관이 됐다. 황교안 검사 등 젊은 검사들이 일과 후 법안과 운영규칙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했다. 민영교도소 법이 통과된 이후로는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됐다. 경기도 여주 6만 평 부지에 소망교도소가 성공적으로 지어졌다. 이후 정부에서 소년교도소를 하나 더 운영하도록 아가페 재단에 제안할 정도로 소망교도소는 잘 운영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견학도 많이 온다. 재범률이 낮은 것도 바람직하지만 1년에 70~80여 명씩 세례를 받고 매주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이 가장 기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 구원받고 사회로 돌아가 빛과 소금이 된다면, 그처럼 교회가 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20년 넘게 함께해 온 셈이다. 물론 내가 크게 기여한 것은 없다. 그래도 초기에 재정도 없고 사람도 없던 때에 자리를 지켰다는 데 대한 보람은 있다. 그때 묵묵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일한 이종윤 목사님, 김승규 전 장관, 황교안 전 총리 등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보람이다. 최근 아가페 재단 설립 이후 인사들의 활동만 거론되고 그 이전의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더 알아주시고 칭찬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 살려낸 일에 참여한 이야기
교단에서 여러 일을 맡아 했던 중에서 특별히 보람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없어질 뻔한 교회를 살리는 일에 참여한 일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강남노회 회계로 일할 때인 1992년 쯤이었다. 서울 수서동에는 우리 노회 소속 수서교회가 있다. 수서교회는 1955년에 창립된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교회가 있는 수서동 일대는 30년이 넘도록 완전한 농촌이었는데, 1980년대 말에 수서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교회 주변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주변이 도시화되면서 농촌 교회 목사에 대한 불만이 하나 둘씩 생겨났고 이것이 갈등으로 빚어졌다. 심각한 갈등이 5년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담임목사는 사례비를 몇 달째 못 받으면서도 교회 지하의 살림집에서 지내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1세대 창립 교인 자녀들 다섯 가정, 12명 정도의 교인만 남고 다들 교회를 떠나갔다.
노회에서는 몇 번이나 수습위원회를 꾸려서 중재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러는 동안 담임목사는 2주 동안 단에 서지도 못하고 기도원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거의 포기 단계였는데 당시 노회 서기를 맡았던, 지금은 돌아가신 일심교회 장주석 목사와 내가 한번 나서보기로 했다.
관계자들을 만나 사정을 들어보니 관계를 회복하기는 이미 틀렸다고 봐야 했다. 감정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우리는 수서교회 교인 10여 명을 대치동 일심교회에서 만났다. 당시 장주석 목사는 40대 후반이었고 나는 50대 초반이었는데, 교회에 모인 수서교회 교인들도 비슷한 연배여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후임 목사 선정은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께 요청해보겠습니다.”
교인들은 우리의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그러나 다음 제안에는 펄쩍 뛰었다.
“우리가 3천500만 원을 만들어올 테니 당신들이 4천만 원을 마련하시오. 목사님 전세금이라도 마련해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당장 전기세 낼 돈도 없다”고 버티는 교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3천500만 원 중에 2천500만 원은 소망교회 농촌교회 개척 지원금이고 1천만 원은 저 박래창 개인이 내는 돈입니다. 여러분이 돈이 없으시다면, 요 앞 마을금고에 가서 대출을 받으세요. 제가 보증서에 서명을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바뀌면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러면 재정이 좋아져서 금세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그만한 부담을 지겠다고 나서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서로 상의를 하더니 우리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그렇게 7천500만 원을 마련해서 담임목사를 만나 설득했더니 교회를 떠나는 데 동의해줬다. 5년을 끌던 갈등이 2주 만에 해결된 것이다. 내가 도움을 주기로 한 대출금도 그들이 알아서 해결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