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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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환 목사의 부임과 교회의 성장

젊은 목사를 추천하다… 수서교회의 새로운 시작

‘통일의 희망을 품고’ 평양에서의 의미 있는 여정

남은 일은 후임 목사를 정하는 것이었다. 갈등이 해결됐다는 소문이 나니 소망교회 부목사 중에서도 가고 싶어하는 이가 여럿이 있었다. 곽선희 목사님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나를 불러서 “박 장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오셨다. 내가 “황명환 전도사가 어떨까요?” 했더니 “아, 황 전도사가 적격이겠네요”라고 하셨다.

황명환 전도사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던, 우수한 지성의 소유자였지만 그보다도 순전한 신앙이 더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장신대학교 학부생 때 나와 같이 소망교회 중등부 교사를 해서 나는 그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수서교회 일로 곽 전도사님께 추천할 당시에는 30대 초반 나이였고, 한 개척교회 전임전도사로 가 있었다. 그가 수서교회에 적격이라고 추천했던 것은 수서교회가 주변의 개발과 함께 도시형 교회가 되면 황 전도사와 같은 지성적인 목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명환 전도사를 수서교회의 후임 목사로 결정하고 그 사실을 교인들에게 전했더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표시했다. 너무 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은근히 소망교회의 경험 많은 부목사를 원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수서교회 교인들이 소망교회로 몰려왔다. 곽 목사님은 그들을 당회장실로 들어오게 했다.

“목사는 목사가 잘 압니다. 황 전도사는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최고입니다. 설교 한두 번 듣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1년간 목회하는 것을 보고 그때도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 동안은 목회 사례비도 소망교회에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설득하자 교인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임이 결정된 황 전도사는 수서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교인은 몇 명인지, 대우는 어떤지 등을 전혀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묻지 않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황 전도사의 부임 예배가 예정된 날은 마침 나의 쉰네 번째 생일날이었다. 전날인 토요일 저녁에 생일잔치를 열기로 진작부터 계획돼 있었기에 우리 집에는 초저녁부터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황명환 전도사와 함께 수서교회를 찾아갔다. 교인들과 첫 만남 자리에 황 전도사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착해서 교회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천장에 고장난 전등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커튼도 너저분하게 먼지가 낀 채로 늘어져 있었다. 깨진 유리창도 있고, 현관문 바로 앞의 화장실은 고장난 문짝이 삐걱거리며 반쯤 열린 상태였다. 당장 내일 주일 아침부터 예배가 진행될 텐데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 밖에도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후 소망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자를 소망교회 청년 중에서 뽑아서 보내주었다. 그랜드피아노도 사서 놓아주었다. 교인이라고는 모두 열댓 명 뿐이었으므로, 소망교회 중등부 교사들이 1부 예배 마치고 가서 자리를 채워주기까지 했다. 나도 한동안 주일 저녁 예배 때 수서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약속한 대로 1년 동안은 소망교회에서 개척교회에 준하는 목사 생활비와 기타 비용을 지원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때, 당회장실로 들어왔던 중심에 있었던 집사님들에게 “담임 목사 바꿔 드릴까요?” 농담을 했다. 집사님들은 “절대 안 바꿉니다!”라며 크게 웃었다.

황명환 목사가 부임한지 30년 된 현재의 수서교회는 2천여 명의 교인이 모이는 대형교회가 됐다. 부지 안에 건물을 신축해서 옮겨간 뒤로 벽돌집 형태의 옛 교회는 개척교회들의 예배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지금도 10개 개척교회가 시간 차를 두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 일을 내가 매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내 생일날마다 황 목사님 내외와 우리 내외가 함께 식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3월 28일 내 생일날 드려졌던 부임 예배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좋은 인연이 올해로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올 통일의 그날을 위해

교회와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며 세계 곳곳을 다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었던 여정은 바로 평양에 갔던 일이었다.

2003년 봉수교회에 처음 갔을 때, 교회를 가득 채운 평양의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동원된 관제 교인인 것은 틀림없으나 거기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봉수교회가 문을 열 때 소망교회가 성경책 1만 권을 기증했는데 그 책을 그곳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한글 성경책으로, 특별히 제작해 일본에서 인쇄한 것이었다. 공동번역 성경을 기준으로 천주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부분을 개혁교회 용어로 절충해 만들었기에 읽기에 편하고 특히 구약을 이해하기 쉽다는 특징이 있었다. 외국인이 예배에 참석하면 기념품으로 가져가도록 돼 있어서 나도 한 권 기념으로 가져왔다.

평양과학기술대를 설립할 때 나는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현지답사를 위해 함경북도 나진선봉지구에도 가고, 평양에서 당시 김책공대 부총장, 김일성대학 부총장, 건축과 여러 교수들, 그리고 북한교육부 전극만 부상(차관급) 등과 사흘간 마라톤 회의를 하기도 했으며, 기공식과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김일성대학교와 김책공대를 구석구석 돌아볼 기회도 있었다.

준공식 때는 놀라운 발견을 하나 했다.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탈 때 성경을 전하며 투항했고, 참수되기 직전에도 성경을 전하며 “하나님은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가 세워졌던 곳이 바로 평양과학기술대 자리였던 것이다. 이 학교가 훗날 하나님의 귀한 사역에 쓰이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해봤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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