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섭섭했다. 하지만 헌금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지는 않았다. 틀림없이 약속을 이행하겠으니 며칠만 더 연기해 달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더니 좀 누그러지셨다. 착실한 학생이니까 봐 주겠다고 해서 학비 마련을 위해 응급 처방을 하게 되었다.
나는 피리를 들고 남들 몰래 후암동 부잣집 동네를 다니기 시작했다. 상상해 보라. 넥타이도 매지 않고 정장도 하지 않은 나 같은 안마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단벌 대학생 복장을 하고 나타났으니 거절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닷새 동안 하면서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간구가 절로 나왔다.
코코아 한 잔과 찐 고구마
어느 금요일 밤 안마 피리를 구성지게 부는데 연세가 지긋한 분이 “학생, 들어오시오” 하고 이층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아마도 광화문 뒷골목 근방인 것 같다. 내가 앉자 숭실대학교 배지를 보더니 “학생이 맞소?” 하면서 먼저 코코아 한잔과 찐 고구마를 권했다.
나는 대접을 받은 뒤 손을 씻은 다음 정성껏 있는 힘을 다해 안마를 하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분도 자신의 이야기를 죽 늘어놓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 숭실대학 근처에서 살았다고 했다.
현재 등록금이 얼마냐고 물으면서 필요한 액수만큼 주실 뿐만 아니라 2천 원을 더 보태 주시는 게 아닌가. 자신도 가난하게 자랐고 지금도 채소 장사하면서 푼푼이 모아 살아가지만 학생의 사정이 급하니 받으라며 앞으로 큰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분의 고마운 정성과 사랑으로 내가 빚진 등록금도 내고 신광교회에는 감사 헌금까지 낼 수 있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이와 같은 영성 훈련과 함께 신학을 하기 위한 기초 학문 연구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신광교회를 찾은 일이 있었다. 현재 합동측 교회로서 봉천동에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당시 나에게 지도를 받던 주일학생 중에는 신광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성공한 실업인들도 있었다. 대한항공 사무장이 된 이도 있는가 하면 뉴질랜드에서 사업을 하는 분도 있었다.
영성훈련과 신학
내가 신학교에 가기 위해 나름대로 기도하고 준비하는 데는 2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이 되어서 진학한 신학생활 3년은 20대란 인생의 황금기에 속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주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헌신한 나로서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 졸업 시험을 치른 후 나는 기숙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갈 곳을 물색하던 중 한 학년 선배인 충청도 양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는 학생 시절 숭실대학 근방에 땅 천 평을 구입해 두 칸짜리 방이 있는 판잣집을 지어 한 칸은 세를 놓았고 또 한 칸은 나와 함께 쓰게 되었다. 그 선배가 내게 밥값만 내고 방을 함께 쓰자고 해서 신학교 가기 전까지만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한 집을 쓰자니 서로가 불편했다. 그 선배는 용돈이 없었던지 대학원 입학원서다 교통비다 해 내가 쓸 비용들을 거의 다 빌려 쓰고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을 찾아가서 용돈을 빌려 신학대학 입학원서를 작성하고 시험 전형료도 지불했다. 신학교 입학 시험도 치르고 면접까지 잘 보고 난 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기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온다
내가 신학대학에 입학하기 일년 전에 숭실대학교에서 장로회신학 대학 교수로 간 주선애 교수님을 우연히 숭실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미스터 김, 축하합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어요.”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1만 3천 원이란 등록금은 호주머니 속에 없었던 터라 숭실대학교 뒷산에 세워 놓은 십자가를 붙들고 한 시간 동안 소리내어 기도드렸다. 혹시나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내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오는 법이다. 기도를 마치고 학교 교목실로 내려올 무렵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은수 목사님을 뵐 수 있었다. 오 목사님은 내 얼굴을 보시더니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 말씀을 드렸다.
교목실로 들어선 오 목사님은 친절하게도 옥호열 선교사님께 전화를 걸어 나의 신학대학 입학금과 장학금 일체에 대한 상담을 하신 후 어서 속히 선교부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곧바로 종로 5가로 달려갔다. 벨을 눌렀다. 옥 선교사 부부는 나를 기쁘게 맞아 주셨고 나의 모든 형편을 소상하게 상담해 주셨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