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의 부흥운동으로 20세기 문이 열리며 영국의 웨일즈, 인도 카시아, 미국 아주사거리, 중국과 원산, 평양, 서울까지 회개와 부흥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시작은 백낙준 박사가 말했듯 한국부흥운동의 기원은 원산대부흥운동이었다. 바로 그 중심에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한국명 : 하리 영) 선교사가 있었다.
하디는 1865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0년 25세 나이에 토론토대학 써클 YMCA 선교후원으로 한국 땅에 파송된다.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토론토 YMCA 선교후원이 중단되었다. 이때 마침 미국 남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할 의료선교사를 찾고 있었다. 미 남감리회는 하디를 목사로 안수하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한다. 하디는 원산에서 활동을 하던 중 1901년, 1902년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선교의 열매는 전혀 없었고 한국인의 서양인들에 대한 핍박과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하디는 자신의 선교에 열매가 없는 것은 조선인의 무지와 야만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몸은 한국 땅에 와 있었지만 서구인의 자만심으로 본국에서 커피와 밀가루를 가져다 먹었다. 영자 신문을 우송해 와서 읽었고 밀려오는 환자들도 예약된 5-6명을 돌보고 무한정 버려둔 채 대기를 시켰다.
1903년 8월 24일~30일 원산지역 여성 선교사들이 준비한 하계 수련회가 원산 바닷가에서 열렸다. 강사로 시니어 선교사 하디를 초청해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했다. 말씀을 준비해 기도하던 중 임재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된다. 선교의 열매가 없는 것은 한국인이 미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 선교사들이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셨다. 하디는 이 모든 부족은 내 탓이요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공개적인 회개를 하며 눈물로 말씀을 전했다. 그때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울며 기도했다. 이것이 이름하여 원산대부흥운동이며 이 부흥의 물결이 1907년 평양대부흥으로 이어진다.
하디가 미국 미시간 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45년간 한국을 섬기고 그의 유해는 양화진에 잠들어 계신다. 그동안 감리교신학교 교장, 병원 설립, 「신학지남」 발간 등 다방면 활동을 하셨다.
1903년 원산 대부흥이 일어나던 그 무렵 한반도에서는 음흉하고도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다. 우리말에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다. 1905년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1907년 고종의 폐위로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광화문 네거리를 도끼로 찍어대며 행진을 하고 자결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일제강점기로 들어선다.
바로 이런 암울한 역사를 준비라도 하듯 교회에서는 1903년 원산대부흥,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난다. 언제나 역사의 위기는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이다. 교회엔 성령의 불이 임하고 부흥을 준비해야 하는 때이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