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교회의 시작… 배유지 선교사의 헌신과 복음의 확산
이야기를 들은 배유지 선교사는 장차 목포가 소망이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낸 배유지 선교사는 서울로 돌아와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저희들의 여행은 대체로 큰 어려움 없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눌서 선교사도 많은 설교를 했으며, 저희들은 51달러를 주고 약 2에이커의 면적을 가진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한 좋은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저희들은 폭풍우를 만났고, 저희들의 배는 3일 동안 한 섬에 정박해 있어야 했습니다. 이눌서 선교사는 심한 배멀미에 시달렸고 저 역시 바다를 건널 때마다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배유지 1896년 3월 3일 화요일, 한국 서울에서)
이상에서 밝혀진 서신 내용을 보면 이미 목포는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주에 선교부를 세우기 전 변창연 조사는 배유지 선교사가 매입해 놓은 땅 목포시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목포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국내의 여러 가지 정세를 살펴보면서 목포도 곧 개항될 수 있다는 판단을 갖고 1898년 3월에 목포로 내려왔다. 그리고 임시 주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해 그 집을 중심으로 증축을 했다. 증축한 그 집을 예배드리는 처소로 사용했으며, 다시 배유지 선교사 주택이 신축되면서 그 곳에서도 예배드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배유지 선교사가 목포로 늦게 이사하게 된 이유는 의료 선교사로 부임하기로 한 오웬(C. C. Owen, 이하 오원으로 표기, 때로는 오기원이라고도 했음) 목사의 도착이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오원 선교사가 부임하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배유지 선교사는 집이 완성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목포에 부임했다.
“문들은 약간 빛이 들어오게 만들어졌으며, 단지 종이로 발라져 있습니다. 벽들은 더럽고 연기로 검게 된 오랜 검은 종이로 덮였습니다. 사실상 내부 전체가 연기에 검게 그을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을 아래에서 지필 때, 연기가 뚫고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님이 보신 흑인의 오두막도 이보다 더 더럽지는 않을 겁니다. 이 방은 제게 있어서 침실인 동시에 부엌이기도 합니다. 방 안에는 저의 간이침대, 세 개의 식료품 상자, 여행용 손가방 등이 있고, 그 밖에 이곳 사람들이 사용하는 두 개의 상자와 집주인 소유인 갖가지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간이침대는 매우 편안하고, 먹을 것이 충분하기 때문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벼룩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배유지 1897년 12월 2일, 한국 목포에서)
배유지 선교사는 고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수시로 서신을 보내면서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선교서신을 받은 배유지 선교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이국땅 한국에 보내놓고 많은 기도를 했다. 위생시설의 부족함과 방 안팎의 청결 문제, 그리고 벼룩, 빈대는 이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벼룩·빈대·이의 침략 부대
배유지 선교사는 하루속히 오원 선교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시간나는 대로 변창연 조사를 대동하고 노방 전도 및 가정방문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가운데 오원 선교사는 1898년 11월에 목포에 도착했으며, 새로운 주택이 완성될 동안 배유지 선교사의 집에서 함께 기거했다. 비록 좁은 공간이었지만 의사로서 그냥 지낼 수가 없어서 목포진료소란 간판을 걸고 일반 환자를 진료했다.
그런가 하면 배유지 선교사나 변창연 조사, 그리고 목포교회 교인들은 오원 의료 선교사의 도착을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12월 12일 오원 선교사 주택 겸 진료소로 사용할 수 있는 주택이 완성되었으니 모두가 기뻐했다.
또한 부녀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트레퍼 여선교사가 합세해 다른 조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낯선 여신도가 스트레퍼 선교사의 집에 나타났다.
“선교사님, 우리 옆집 아주머니가 복어국을 먹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남편과 자녀들도 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빨리 갑시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복어국을 잘못 끓여 먹고 생명이 위급한 그들을 동네 사람들이 업도록 해서 오원 선교사의 집으로 왔다. 오원 선교사는 사태의 긴박함을 느끼고 곧 응급조치를 취해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다. 이 소식이 어느덧 유달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옹기종기 초가집에 모여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예수를 믿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남교동 수문통을 건너 목포교회로 몰려왔다.
배유지 선교사는 기뻐했다. 그는 목포교회 하나만 설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주와 군산을 오르내리면서도 그가 머문 곳에서 전도를 하고 교회 설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목포교회는 변창연 조사와 배유지 선교사의 활동으로 매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몰려왔고 노학구, 김만실, 김현수, 임성옥, 지원근, 마서규, 김치도 등 20여 명이 새로 믿기로 작정했다. 이들은 배유지 선교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스스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중 임성옥, 지원근, 마서규는 훌륭한 전도자로서 배유지 선교사를 돕기 시작했다. 임성옥은 주로 해남, 강진, 진도, 장흥 지역을 맡았으며, 지원근은 영암, 함평, 무안지방을 맡았다가 후에 배유지 선교사가 광주로 이거하자 광주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마서규는 광산과 나주 지방을 맡으며 전도에 임했으며, 목포교회도 이들의 활동으로 매년 그 교인수가 증가해 1901년에는 75명으로 증가되었다. 이 일로 배유지 선교사는 주일이 되면 2회로 나누어서 예배를 인도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