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잃고 삶 회의 느껴… 악명 높은 불량한 생활
전도 받아 신약성경 1년에 100독, 독실한 신앙인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장로교 목사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태원면 평촌리(黃海道 安岳郡 泰元面 平村里)에서 농부인 아버지 김응선(金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7세가 되면서 상업을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서 유산을 모두 잃으며 삶에 회의를 느꼈으며, 술을 많이 마시고 노름을 좋아하는 생활로 타락했다.
그는 악명 높은 불량아로서 안악군 일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구나 그에게 대항했다가는 모조리 때려눕히는 완력가인지라, 그를 아는 사람들은 시장에 가는 도중에 서낭당 앞을 지나게 되면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안악시장에서 그가 술과 냉면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는 것은 예사였으며, 그렇다고 잘못 건드리면 무슨 변을 당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도 그에게는 독촉하지 못했다.
어느 여선교사가 그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기를 권고했다. 그는 전도지를 받아 쥐자 코를 풀고 그 종이를 돌려주며 그 선교사를 희롱했다. 그러니까 여선교사가 “청년, 그렇게 하면 코가 썩지요” 한 말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27세인 1900년 봄에 김익두는 친구 박태환(朴泰煥)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에 갔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스왈른(Swallen W.L.)의 ‘영생(永生)’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신약성경을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그 후 1901년 7월에 김익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을 때까지 언행을 삼가 조심했고,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성경을 100독할 정도로 생활을 경건하게 했다.
하루는 술친구가 찾아와서 술을 마시자고 유혹했다. 그는 지금 약을 먹는 중이어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신약과 구약을 먹고 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물론 신구약 성경을 읽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신구약의 보약을 먹고 산다고 하는 말은 김익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901년 그가 27세 되던 해 주일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런 그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후 부고장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그놈 잘 죽었다’ 하는 심정으로 장례를 구경하러 장례장소로 가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모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로 기뻐했다. 그런데 잠시 후 죽었다던 김익두가 걸어 나오며 하는 말이, “여러분, 제 장례식에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는 것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난리가 났는데 김익두가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김익두가 예수를 믿은 후 어느 날, 냉면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보기도 싫고 밉기도 해서 뜨물 찌꺼기를 그가 지나가는 옆에 확 뿌렸다.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그 애를 몹시 책망했다. 그런데 김익두가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갔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