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선교사 묘지공원에 올라 처음 만나는 선교사가 1903년 원산대부흥의 주인공 하디(R.A. Hardie)이다. 하디의 비문을 읽고 뒤를 돌아서면 헐버트(H.B. Hulbert)와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발걸음을 떼지 않고 세 분 선교사를 만나고 나면 어느새 우리는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라고 말했고, 루비 켄드릭은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이 생명을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이다. 그가 한국으로 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서구 여러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은 통역관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부는 육영공원(영어 학교)을 세우고 교사를 초청해 헐버트가 1886년 교사로 오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감리교회 목사가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헐버트는 목회, 문서 선교, 저술, 조선의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고종의 호위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헐버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결과로 미국의 묵인하에 일본이 강압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고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하게 한국을 지배해 가는가를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급기야 헐버트는 본국 소환 형식으로 추방을 당했으나, 한국을 사랑하고 실상을 알리는 일을 밖에서도 쉬지를 않고 있었다.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소망처럼 1949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나 한국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에 8월 5일 그가 그토록 사랑한 한국 땅에서 별세하며,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을 통해 양화진 한국 땅에 묻히셨다.
지난 2024년 8월 30일 양화진에서 헐버트 75주기 추모예식이 있었다. 그는 세계 그 어떤 글자도 한글에 견줄 수 있는 문자는 없다고 말할 만큼 한글 애찬론자였다. 아리랑을 서양 음계에 맞춰 악보화한 분도 헐버트였다. 한국을 방문한 그의 손자는 아리랑을 즐겨 부르던 할아버지로 헐버트를 추억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더 엄청난 일을 했던 사람, 헐버트는 23세에 한국 땅을 밟은 뒤 63년을 오직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 한국이 독립하기를 갈망하며 일하다 86세에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헐버트 선교사로부터 발도 떼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분이 바로 루비 켄드릭이다. 그녀는 24살 꽃다운 나이에 한국 땅에 와서 단 9개월 만에 맹장 수술 후유증으로 별세한다. 그녀가 남긴 편지를 읽다 보면 우리 눈은 고장난 수도꼭지가 되어 버린다.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습니다. (중략)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후략)」
분명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우연이거나 우리가 잘 나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리라! 분명 이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피 위에서 피어난 꽃이리라.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