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눈이 내리고 음산한 겨울 날씨였던 터라 따뜻한 홍차에 곁들인 빵 두 쪽을 먹고 나니 얼었던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기도가 곧장 응답의 기적으로 연결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옥 선교사님은 등록금이 든 봉투를 건네주셨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토요일 오후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등록하러 갔지만 토요일 오후라 이미 업무는 끝났다고 해서 마지막 등록일인 월요일로 미루게 되었다.
또 한 차례 입학 홍역을 치르다
그러나 등록자 명단을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더니 이게 웬 말인가. 내 이름은 청강생으로 발표가 되어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전화로 주선애 교수님과 이종성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종성 학감님은 모든 합격자 명단이 자신의 결정으로 발표되는데 행정상 무슨 일이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또 한 차례의 입학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나란 존재는 왜 이렇게도 새로운 상황을 열어갈 때마다 장애물 경기를 하듯이 딛고 넘어서야 할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런 하자 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이 허락되었다던 합격은 어디로 가고 청강생의 신분으로밖에는 못 들어가는 신학교라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밝힐 것은 꼭 밝혀내고 싶었다.
그러나 월요일, 입학금을 내기 위해 다시 신학대학을 찾았을 때 아주 인품이 좋아 보이고 다정다감하신 박창환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박 교수님은 나의 1년 선배인 모 시각장애인 신학생이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 중에 부덕한 일이 있었기에 나 역시 일년 동안이라도 청강생으로 두고 보자는 뜻에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내가 정규 중고등학교와 일반 정규 대학 졸업생이 아닌 줄 착각했다면서 사과했고, 나는 정정당당하게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이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박 교수님과는 신학석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5년여 동안 함께 사제지간으로 신학 연구 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나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재미 한인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박 교수님을 만나뵐 기회가 되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하면서 사제지간의 정을 쌓아 나갔다.
신학대학 3년 과정은 이수해야 할 과목이 너무나 많았다. 신약신학, 구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목회학 분야를 위시해서 120학점을 따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어디 그뿐이랴.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도 3년 동안 공부해야 했으니 이렇게까지 신학 연구 활동이 어려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과 비교해 볼 때 신학대학 3학년 과정은 전문 목회 분야인 만큼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학문이요,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사귈 여유도 없이 전문 목회자 양성의 길인 신학이란 학문의 길을 참고 달려가야만 했다. 그때 입학한 정규 과정 학생이 40명이었던 것 같다. 전국 여러 대학에서 몰려왔고 또한 각 노회의 추천이나 당회장의 추천도 받아 왔기 때문에 목회적 소양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한 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상당한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 심지어는 마흔 살 된 전도사님도 함께 공부했다.
그렇다고 신학생 모두가 목회를 전공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소명감에 불타는 심정으로 달려온 신학생 중에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 같다며 한 학기를 미처 채우지도 못한 채 휴학한 친구도 여러 명이나 되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은 여전히 대학생의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학문적으로 신학을 습득 하다 보니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기도생활과 영성 훈련은 등한히 하는 것 같았다.
교수님들은 한결같이 신학교는 학문의 전당이나 목회자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를 이끌어 갈 하나님의 사명자를 양성하는 곳이기에 목회자적 자질 향상을 위한 경건 훈련이 우선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셨다.
장신대에 들어온 많은 학생들은 소명의식이나 직업의식에 있어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내가 목적한 복음선교란 프로그램이 서서히 확정되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선지 동산’이라는 영성 훈련장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나에겐 무거운 짐을 진 십자가의 삶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그 많은 학과목을 이해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도 고달프고 힘들었다. 게다가 내면의 영적 갈등도 합쳐져서 내가 걸머진 십자가는 왜 이다지도 무거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아가려고 했지만 내 앞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든 극한 상황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