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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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지역 최초 교회와 목포선교부의 초기 선교 활동

광주 지역의 첫 교회

한편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교회를 관리하며 지방 도시에 교회를 하나둘씩 설립했는데 나주에서 전주로 가는 국도변에 우산교회를 설립했다. 우산교회의 위치는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에 있는 지역으로서 송정역에서 비아 쪽으로 진입하는 도로변 롤러스케이트장 부근이다. 

“光州郡 松汀里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宣敎師裵祉吳元의 傳道로 漸增함에 牛山里에 禮拜堂을 新築하고 會集하더니 其后에 松汀里에 移轉하니 助師는 趙尙學외 人이 視務하니라.”(車載明 篇, p. 91)

우산교회는 배유지, 오원 두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로서 교인이 증가하고, 장차 기차역이 생긴다는 말에 1901년 우산리에서 송정리로 옮기고 송정리교회라 불렀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원 선교사의 목포 도착 연도를 1898년 11월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하나는 나주 지방에 첫 교회 설립인데, 이 교회는 광산군 우산교회에 다니던 교인들이 1899년 나주군 삼도리에 설립한 교회이다. 삼도리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羅州郡 三道里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元三, 李文五, 尹相三等이 믿고 光州 牛山敎會에 다니며 禮拜하더니 李文五는 酒業을 廢棄하고其 旅幕을 禮拜處所로 使用할새 宣敎師 裵裕祉의 地方에 屬하여 傳導人 馬瑞奎가 引導하였으며, 其后에 光郡 河羅里와 光州 九巢兩處로 敎會가 分立되니라.”(車載明 編, p. 63)

우리는 지금까지 우산교회, 송정리교회, 삼도리교회를 살펴본 결과 광주 지방의 최초 교회의 설립은 1899년으로 추측되며, 1899년 우산교회가 설립되고 그 후에 삼도리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조장을 처분한 김윤수

한편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에서 전주를 다닐 때는 국도변에 있는 삼도리교회, 송정리교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활동했다. 그런데 1899년에 목포교회에 뜻밖의 기쁜 일이 생겼다. 배유지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김윤수라는 사람의 개종 이야기였다. 김윤수는 원래 구한말 함경도 원산 지방에서 경찰관 간부인 총수일을 맡았던 사람인데 나라가 점점 기울어지자 총수직을 사임하고 살기 좋은 목포로 왔다. 목포는 개항도시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그래서 김윤수는 그동안 벌었던 돈으로 양조장을 경영하면서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김윤수의 모친이 손등에 종기가 생겨 아무리 좋은 약을 써봐도 아무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김윤수는 어머니를 업고 오원 선교사의 목포진료소를 찾아왔다. 이 일을 계기로 김윤수는 오원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목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김윤수는 오원 선교사의 권유로 학습교인이 되겠다고 문답에 임했다. 그런데 배유지 선교사는 그가 양조장을 운영한다는 이유로 불합격을 시키고 말았다. 이때 김윤수는 경찰 간부답게 그 양조장을 처분하고 학습문답에 임했으며, 학습은 물론 그후 세례문답에까지 당당하게 합격했다. 이 일로 배유지 선교사는 좋은 협력자를 얻게 되었으며, 김윤수는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 광주선교부 창설 당시 일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배유지 선교사는 오원 선교사, 스트레퍼 선교사의 도움에 항상 감사함을 느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는 여느 날과 같이 1901년 4월 9일 전주에서 모이는 선교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떠났다. 그런데 4월 11일 전주에서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군산으로 달려갔으나 곧장 떠나는 배가 없어서 몇 날을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4월 12일 부인이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고 그가 운명한 지 4일 후에야 목포에 도착하게 되었다.

배유지 선교사의 부인 로티는 다섯 살 난 아들 헨리, 두 살 난 차롯테를 남기고 하나님의 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전주에 있는 이눌서 선교사와 다른 동료들이 내려와서 목포교회 교인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고 그의 시신을 서울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의 죽음은 목포교회로서도 큰 충격이었다.

이 일로 배유지 선교사는 두 자녀를 데리고 1901년 5월 1일 일본을 거쳐서 미국 본가로 떠났으며, 두 자녀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맡기고 얼마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안정을 되찾고자 했다.

한편 목포선교부에서는 전주에 있는 이눌서 선교사로 하여금 임시로 배유지 선교사가 귀임할 때까지 교회를 지키게 했다. 배유지 선교사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목포교회와 목포선교부로 돌아왔다.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정명여학교와 스트레퍼 선교사

이미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목포선교부에 정착을 하고 배유지 선교사와 함께 목포 지방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미혼이었기에 부녀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했다. 목포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정명여학교 출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02년 봄 어느 날 스트레퍼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첫 수업시간에는 남녀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파악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교육에 두고 있었다. 바로 1903년 남자학교와 같이 출발하게 되었던 정명여학교는 이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1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을 모아 보통과 과정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한편 그의 조사였던 변창연도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의 수고로 학교는 계속 발전하게 되었다. 25명의 여학생들이 다니는 이 학교는 한 한국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 스트레퍼 선교사가 가르치고 있었다.” (1905년 9월 제14회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보고서 중에서)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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