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30년째 『기름집』을 하는 친구가 있다. 고추나 도토리도 빻아 주고, 떡도 해 주고, 참기름과 들기름도 짜 주는 집인데, 사람들은 그냥 『기름집』이라 부른다. 그 가게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달력? 가족사진? 아니면 광고? 궁금하시죠? 벽 한 가운데 한편의 시(詩)가 붙어 있다. 그 시가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서시(序詩)」이다.
시장에서 『기름집』을 하는 친구가 시를 좋아하다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어느 날, 손님이 뜸한 시간에 그 친구한테 물었다. “저 벽에 붙어 있는 윤동주 ‘서시’ 말이야! 저기 저렇게 붙여둔 이유가 있는가?” “으음, 이런 말하기 부끄럽구먼!” “혹시 무슨 비밀이라도?” “그런 건 아닐세. 손님 가운데 말이야. 꼭 국산 참깨로 참기름을 짜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렇겠지. 우리 아내도 국산 참기름을 좋아하지.” “국산 참기름을 짤 때, 값이 싼 중국산 참깨를 반쯤 넣어도 손님들은 잘 몰라. 자네도 잘 모를걸!”
친구가 말을 잇는다. “30년째 『기름집』을 하면서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욕심이 올라올 때가 있단 말일세. 국산 참기름을 짤 때, 중국산 참깨를 아무도 몰래 반쯤 넣고 싶단 말이지.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내 손으로 벽에 붙여놓은 윤동주 「서시」를 마음속으로 자꾸 읽게 되더라고.”「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구절을 천천히 몇 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시커먼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30년 동안 저 시가 나를 지켜준 셈일세. 저 시가 없었으면 양심을 속이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하하.”
그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그 친구가 좋아하는 구절을 웅얼거려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기 인용한 시가 바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윤동주 선생의 ‘서시(序詩)’의 전문(全文)이다. 첫 줄부터 가슴이 찡하고 울린다. 자주 읽는 시인데, 읽을 때마다 울림을 주곤 한다. 첫 문장이 주는 무게가 상당하다. “윤동주 선생이 그의 짧은 28년의 생애를 어떻게 살았는지?”하고 생각하면 그의 인생관이 느껴진다. 그가 쓴 시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그 힘든 시절을 버티고 견뎌준 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이다. 매 순간 삶의 의미를 찾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준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기독교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양심’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지닌다. 개인과 문화에 따른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 양심’이기 때문이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하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도바울은 “믿음은 양심이란 그릇에 담겨 있다”고 말하였다. 믿음도, 양심도 모두 지식이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므로 인간의 양심, 곧 영(靈)의 상태와 기능들을 살피신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인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 믿음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실천을 행하도록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행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양심」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현대는 양심이 무뎌진 시대”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봉(年俸)을 받는 노동자와 연봉을 제공해야 할 기업가의 양심이 충돌한다. 무엇이 더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간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일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