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방의무를 다하기 위해 1962년도 여름 부산에서 해병대에 지원했다.
50명 병사모집 7:1의 경쟁률을 뚫고 나는 자랑스런 귀신 잡는 해병용사가 되었다. 해병진해기지사령부 내 해병신병훈련소에서 12주 소정의 훈련을 다 마치고 팔뚝에 이등병 계급을 달았다. 하나님 은혜로 해병진해기지 영선중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아침 해가 밝게 뜨고 바다 물고기가 펄펄 뛰어 오르는 경화동 푸른 바다는 해병의 희망이 넘쳐 흘렀다. “나가자 해병대” 군가가 높이 들리는 듯했다.
1963년 1월 23일 해병진해기지 영선중대 대표로 정훈참모실 주최 제1회 방공웅변대회에 참여했다. 군인교회에서 13명의 연사가 열변을 토한 심사결과는 오동춘 해병이 1등이었다. 1등 한사람에게만 수여한 상장은 위에 “제1호 상장”이라 쓰고 내용에는 영선중대 이병 오동춘을 쓴 아래 “위사람은 제1회 방공의 날 웅변대회에서 확고한 멸공정신의 결의와 간첩침략 분쇄에 총력을 경주키 위한 열변으로 우수한 성적을 획득하였기에 이에 상장을 수여함” 그 밑에 1963년 01월 23일 해병진해기지사령관 해병준장 송인명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의 연제는 ‘5.16 군사혁명과 우리의 각오’였다. 나는 첫째도 방공! 둘째도 방공! 방공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사자 울음처럼 크게 부르짖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나라 세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반공반일”이 국시였다. 공산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반대였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1916-1979) 대통령은 혁명공약 제1항에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다. 참고로 5.16 혁명공약 6개항을 살펴보자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리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는다. 이 혁명공약대로 3년간의 군정을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 후 1963년 10월 15일 윤보선 전 대통령을 야당 후보로 맞으며 대통령 여당후보로 출마했다. 5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면서 9대까지 혁명공약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가며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룬 것이다. 새마을정신으로 국민의식 개혁과 함께 농촌경제 발전과 주거환경을 근대화 시켜 지금 도농간에 문화환경에 큰 차이가 없다. 김일성 북한 수상이 1950년 6월 25일에 남침해 나라 비극을 연출하고 중공군이 우리 남북통일을 방해하며 참전했던 공산 만행을 잊을 수 없다. 1968년도 울진 삼척 공비 침투 때 강원도 평창 이승복(9세) 어린이가 남한 민주주의, 북한 공산주의 어느 쪽이 좋으냐는 질문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쳐 어머니 누이동생 둘과 함께 일가족 4명이 공비에게 참살 당했다. 오늘의 대한민국 자유민주의 행복을 모르는 좌파종북세력은 깊이 회개하고 좌우 화합 하나 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가 북한 사회주의, 중국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게 우리는 방공, 반공 민주사상으로 무장해 자유, 평화의 대한민국을 철저히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