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말 : 새로운 과제
그리스도교 신학이 개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운명에 관해 설명하려고 할 때, 특히 헬라적 사유 체계 속에서 형성되어 온 ‘영혼의 불멸’ 이론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전통적 신학이 중간 상태, 곧 죽은 자의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사고로부터도 적잖은 도움을 받았지만, 몸과 정신 또는 몸과 영혼의 관계를 이원론적으로 설명한 그의 체계를 아무런 비판과 수정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몸과 물질과 현실 세계까지 경시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본질을 세계의 갱신과 완성이 아니라 세계의 초월이나 세계 도피를 통해 설명하려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도신경을 비롯해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주류 신학자들이 부활의 사실성과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앞에서 우리는 특히 부활의 시간을 중심으로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해 보았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곧 ‘현재적 부활’과 ‘죽음 속의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 부활’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소망하는 부활의 진리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고 오직 하나여야 한다고 우리가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한 관점과 사유 체계 속에 계속 새롭게 해석되고 늘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의 부활이라는 진리가 어찌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세 가지 견해를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거나 적절히 조정해야 하겠는가? 여기서 네 가지 대안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망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중에서 오직 한 가지 견해만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입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장점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점은 다른 견해를 무시하거나 배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독점하려는 오만에 빠질 수 있으며,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매우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견해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세 가지 견해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단점을 최대한 배제하는 가운데서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견해를 선택하려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처럼 하나의 실체를 세 가지 양태로 설명하려는 입장과 비슷하다. 이것은 점점 더 다원화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다른 견해를 너그러이 포용하는 입장으로서 긍정적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적 관점에서도 그 장점은 적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절망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는 ‘현재적 부활’을 설명하고, 죽어가는 자들이나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서는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설명하며, 세계의 총체적 위기와 극단적인 절망 속에서 탄식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미래적 부활’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점을 들라면, 부활의 소망이 매우 모호해져 버리거나 자의적, 임의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되며, 시대와 상황에 적당히 영합하려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같은 태도로도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현재적 부활’이나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최종적 부활의 선취(先取)로 해석하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구원을 미래적, 종말론적 구원의 약속과 보증, 선수금과 미리 맛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의 선포와 바울의 신학과도 잘 어울린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왔고, 우리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미래의 소망으로서 여전히 기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세 번째 입장은 가장 건전하고 성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을 우리가 적절히 설명하고 조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신학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우리는 종종 극단적인 위기와 시대적 전환 앞에서 너무나 자주 극단적 입장에 치우치곤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가능한 새로운 입장을 추론해 보자. 그것은 세 가지 부활을 점진적, 과정적 사건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다.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에서 극단적인 입장을 회피하려는 신학자들은 종종 ‘완성되거나 성장하는 종말론’을 제시하곤 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겨자씨’, ‘누룩’의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점진적으로 확장, 실현되어 가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 가지 부활을 예컨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활은 세 가지 다른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 첫 번째 부활, 곧 ‘현재적 부활’은 ‘정신의 부활’과 같다. 물론 정신은 몸과 전혀 무관하거나 몸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독립적 현상이 아니다. 정신의 부활은 부분적이나마 몸의 부활로도 나타나며, 그래서 전인적 부활로도 경험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부활, 곧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은 ‘몸의 부활’과 같다. 물론 죽음 속에서 첫 번째 몸은 변화를 겪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덧입거나 갈아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몸도 분명히 하나의 몸이라는 점에서 예전의 몸과 함께 비연속성만이 아니라 연속성도 띠게 된다. 세 번째 부활, 곧 ‘종말론적 부활’은 ‘우주적, 총체적 부활’로서 모든 피조물의 완전한 교통과 투명한 사귐을 초래한다. 개인적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주적 부활로 완성된다. 이러한 입장은 만물을 과정적, 점진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현대인의 세계관에 매우 잘 맞는다는 장점은 지니지만, 이를 합리적, 경험적으로 충분히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단점도 여전히 지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마치 옛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투명하게 보게 될 것이며,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완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전 13:12) 그러므로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인이 만물의 창조자와 구원자와 화해자이신 하나님에게 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신건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전)
•생명신학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