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그렇게 넓은 들판과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런 똑같은 모양의 꾸밈이나 장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집합 건물들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여기저기 한결같은 병영의 건물들이 어떤 풍경이나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슨 독립가옥 형태처럼 그 어떤 목적 의식에 의해서 건축한 듯 살벌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키 큰 포플러 나무들이 듬성듬성 둘러싸인 담장엔 가끔 유월의 아카시아 나무들이 신나게 꽃을 피우며 경계하듯 바람에 일렁이고 있는 1962년 6월 25일 나는 대한민국의 국방의 의무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천여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많은 신병들 속에 까까머리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어떤 인격이나 개인적인 용무나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절도나 규칙과 규범에서만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동작만 반복되는 일사불란한 군대 생활을 규율처럼 지키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 성품과는 너무도 다른 그곳에 적응하며 어떻게 내가 6주 동안 훈련병으로 거듭났는지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다. 규율과 규범과 기강 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나날 속에서도 어쩌면 나와 굳게 미래를 언약한 지금의 아내의 편지를 가끔 받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요 큰 위안이었다.
중대 본부에서 기간병이 훈련병에게 편지를 나누어줄 훈련이 끝난 오후 여섯시쯤이 그렇게 기다려졌다. 나는 그 와중에서도 훈련이 힘들 때면 주님을 불렀으며 이런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수없이 기도하며 지냈다.
그리고 훈련 중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이나 취침 때, 혹은 휴일날이면 앞으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 후 신학대학교의 복학 문제를 생각하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국가 방위를 의무로 한 병영이란 거대한 집합체에서는 오로지 개인의 자유는 깡그리 없어지고 명령과 복종만이 지배되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다 보니 훈령병들은 남을 돌볼 겨를도 없이 다들 자신들이 온전히 살아남기 위한 훈련병 수칙과 상황에만 적응해 나가느라 정신을 잃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솔선수범하며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적응을 잘하는 나의 성격이 이때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훈련교범의 우수한 숙지 상황과 그리고 예의 바른 행동이 호감을 샀는지 중대본부의 기간병이나 중대장님을 비롯한 내무반장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과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훈련시기가 찌는 듯한 더위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야외 교장에 나가봐도 은폐물이나 가림막 하나 없는 햇빛과 열기로 곤욕을 치루었으며 훈련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십리길은 족히 넘는 거리를 완전 무장한 채 구보로 훈련소까지 오니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훈련복은 땀에 절어 소금꽃이 필 정도였다. 더러는 낙오자가 되어 퇴교하는 훈련병도 있었으며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는 동료들도 있었다. 여태까지 편안하고 근심 걱정 없는 환경에서 앞일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게는 이 모두가 하나의 꿈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나마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내가 대견스럽기조차 했다.
이 와중에서도 같은 훈련병들에게 나는 인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사흘에 한 번씩 화랑 담배 한 갑씩을 주었는데, 대부분의 신병들이 너무 부족한 담배 수량 때문에 힘겨워 했으며 심지어 골초들은 돈으로 담배를 사고 다른 물품으로 교환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예 담배를 못했으므로 화랑 담배가 나올 때마다 내 옆에는 자연 내게 환심을 사려는 골초들이 아양(?)을 떨며 진을 치고 있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력 수준이 형편없었으므로 고등학교 정도만 나와도 남달리 보였는데 대학 재학 중에 온 나는 중대본부에서나 내무반에서도 은근히 관심을 받았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직업과 직종에 종사하다 온 많은 장정들 속에서 여러 유형의 삶과 살아온 내력이 각기 다른 수많은 인생관들이 모인 이곳에서의 생활은 후일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체험적 요소가 되었으며 나름대로의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초점은 자연 내가 목적한 목사가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 내 적성에 과연 맞는가 하는 점이 유일한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꼭 해야할 일 미래에 대한 나의 선구안이 점차 명료해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꼭 목사의 과정을 가지 않더라도 평생을 기독교리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충실히 성령의 말씀을 지키며 불쌍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더불어 베풀며 봉사하며 동행하는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점차 느껴지기도 하는 숙고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훈련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팔월 어느 날 야외 교정에서 검푸른 절정의 녹음들을 보며 이제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갑자기 장래의 아내가 될 그 사람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래의 희망적 사안인 목사에 대한 여러 상황적 인식을 돌아보며, 나는 이때 비로소 신학대학교를 복학하지 않기로 어느덧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모든 것에서 너무 모자라고 나의 취약한 여러 부분과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나의 완성이 더욱 시급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목사란 하나의 운명론적인 사명감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분의 마음과 정신 안에 존재하는 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능히 실천하고 껴안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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