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믿음] 말은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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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에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말은 소통의 수단이다. 사람의 음성을 통해 상호 간의 사상이나 감정, 의지 같은 것을 전달하는 것이니 말이다. 말의 기원을 크게 나눠서 신의 선물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지은 바 되었고 또 다른 이론은 인간의 진화론에서 기원한다고 했다.

요한복음 첫머리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신의 선물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기원을 몇십만 년 전으로 소급해서 보고 있다. 인간이 말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목의 후경이 내려앉아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약 30만 년 전에 이미 그와 같이 진화되었다는 설도 보이고 있다. 여하튼 간에 인류문화가 발달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도 급속히 발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로부터 나오는 속어들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의 모순이 문화를 저해할 수도 있다. 좋은 말이나 진실된 말은 인간을 감화시켜 소통을 잘되게 하지만 음모와 거짓된 언어들이 그 시대에 따라 난무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그 결과에 따른 암흑의 시대상을 보이기도 한다.

사경에 있는 사람이 후회하는 것 중에서 그 첫 번째가 남의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살고 있다.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통해 수없이 많다. 30년 동안 재상을 지낸 중국의 풍도라는 선비는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해치는 칼이다. ‘구자환문설자해도(□者患門舌者害刀)’라고 했고 또한 외국 속담에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16세기부터 내려온 『명심보감』에서 보면 윤리와 도덕,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의식이 여과없이 들어온 현실주의에서 언어의 바탕이 흐려지거나 상실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명심보감』 언어편을 보면 군(君)이 왈(曰) 구설 자는 화환지문(禍患之門)이요 멸신지부야(滅身之斧也)라고 했다.

이는 곧 군평이 말하기를 입과 혀는 화와 근심의 근본이며 몸을 망하게 하는 도끼와 같은 것이니 말을 삼가야 할지니라고 했다.

또한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언시할설도(言是割舌刀)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안신처처우(安身處處宇)니라. 이는 곧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은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어도 편할 것이니라 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 조선 숙종 때 이정보의 시에서 보면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니 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고서에도 보면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고 했으니 말하기 전에 반드시 세 번 생각하는 차원에서 말할 때 침을 한 번 삼키고 난 다음 말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끝으로 성경에서 나타난 말의 언어문제는 참으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 10:32),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고 했다. 이같이 말로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때 참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말로서 구상이 되게 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사회질서가 지켜지며 삶의 현장이 항상 즐겁고 기쁘게 되어, 세계 열방을 품고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최석산 장로(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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